찔레꽃 / 김정례
나의 찔레꽃은 동지섣달 긴 밤에 피어난다.
십이월에 접어들면 모임마다 송구영신의 아쉬움을 뜻있게 보내려고 저마다 색다른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막상 모임에 가보면 내용은 뻔하다. 총회와 식사를 하고 초청 밴드나 노래 연습장에 가는 것이 대부분 정해진 코스다. 그래도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니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연말의 들뜬 분위기 탓이리라. 묵은 때를 털어버리고 다가올 새해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도 여전히 노래방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곁에서 걷던 회원이 슬며시 다가와 ‘진달래꽃’을 또 부를 거냐고 묻는다. 잠깐 의아해했으나 이내 알아차리고 파안대소를 하였다. ‘진달래꽃’이 아니라 ‘찔레꽃’이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백난아의 ‘찔레꽃’을 불렀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도 나를 보며 ‘찔레꽃’ 노래를 떠올렸는가 보다.
‘찔레꽃’ 부르기는 이 모임만이 아니다. 수년 전 대전 유성에서 있었던 여학교 총동창회에서의 일이다. 2부 행사에서 기수별로 장기자랑을 했다. 우리 기는 나를 내세웠다. 멀리 부산에서 온 배려인 듯싶다. 무대를 향하여 걸어 나가는데 “부산 김정례, 또 찔레꽃 부르려면 올라오지 마라”며 사회를 맡은 선배 언니의 마이크 소리가 귀를 울렸다. 일시에 행사장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찔레꽃’을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애창곡 하나 못 만들고 있다. 기껏 배워서 준비해 두지만 마이크 앞에 서면 입과 귀에 익숙한 ‘찔레꽃’이 튀어나온다.
좋아하는 노래가 또 있긴 하다. 기껏 새 노래를 찾은 것이 이연실의 ‘찔레꽃’이다. 감정을 잡아 부르다 보면 애련한 가사와 곡조가, 고달팠던 어머니를 떠오르게 한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이라는 가사에 다다르면 목이 메이고 눈가에 이슬까지 맺힌다.
‘찔레꽃’은 고향과 엄마를 그리는 대명사로 쓰인다. 그 이름 뒤에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고려 때 마음씨 착하고 예쁜 찔레라는 아가씨의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은 궁녀로 뽑혀 갈 것이라고들 하였다. 그런데 산골 처녀는 몽골의 볼모가 되어 끌려가게 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좋은 주인을 만나 호의호식을 하였으나 마음 속엔 그리운 고향 생각뿐이었다. 십 년 후 부모형제를 찾아 고향에 왔으나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찔레는 동생을 부르며 산과 들을 헤매다 지쳐서 죽고 만다. 그 한이 깊어 개울과 골짜기마다 꽃이 피어났다. 찔레의 마음은 흰 꽃이 되고 흘린 눈물은 붉은 열매로, 동생을 부르던 소리는 향기가 되어 온 산천에 곱게 피어났다.
내 고향 충정도 새골재 너머에 할머니 댁이 있었다. 그곳은 아버지가 태어난 안태고향이다. 십여 세부터는 십릿길을 곧장 혼자서 다녔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산바람 소리가 들리는 날에는 무섭기도 했지만 그럴 땐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하고 목청껏 노래를 불러서 위안을 삼곤 했다. 뜀박질도 하며, 길가에 난 긴 풀을 양쪽으로 묶어 누군가 풀에 걸려 넘어지겠지 하는 장난도 쳤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재를 넘고 앞 동구나무에 닿는다.
산 끝자락으로 이어지는 둔덕진 밭둑에는 찔레꽃나무 한 무더기가 길손을 반겨주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찔레꽃은 먹어도 된다고 일러 주셨다. 처음엔 무슨 꽃인지 알지 못했다. 나락을 튀긴 튀밥같이 작고 하얀 꽃이 피어 있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작은 꽃잎 속에 노란 꽃술은 앙증맞은 꽃애기 같았다. 얇은 꽃잎을 몇 개 따 혀 끝에 올려 먹어보니 달큰하고 상그러운 향기에 무섬증과 피곤이 싹 가시는 듯 했다. 어쩌다 꽃이 저버렸을 때에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새댁 시절 어머니의 생신 때 친정에 갔었다. 그날은 첫눈이 내렸다. 지난여름까지 근력이 정정 하시던 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시다고 하셨다. 다음날 서둘러 초겨울의 한기를 받으며 숨가쁘게 새골재를 올라갔다. 나뭇가지를 흔들며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도 무섭지 않았다. 재를 넘어가는 길 양쪽에는 찔레꽃 같은 하냔 눈송이들이 이어져 있었다. 재 넘어 동구나무는 어느새 고목이 되어 휑하니 파인 속을 보이며 앙상한 노구를 힘겹게 지탱하고 서 있다. 둔덕에서 환하게 웃어주던 찔레꽃이 빨간 망울을 맺었다. 그날따라 반가운 기색도 없이 입을 꼭 다물고 처연히 맞아준다. 그 망울이 마치 눈물을 너무나 흘려 빨갛게 된 눈을 닮았다. 발자국을 뗄 때마다 사그락거리는 눈 소리만이 할머니 댁까지 따라올 뿐이다. 이듬해 할머니는 영등 달에 내려온 영등 할머니를 따라 세상을 떠나가셨다. 찔레꽃 열매 같은 일곱의 자식과 수십 명 손자들이 찔레꽃잎이 떨어지듯 눈물을 뿌리며 꽃상여 뒤를 따랐다.
노래가 한 바퀴 돌아 내 차례가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탓일까. 마이크를 잡고는 전주에 맞춰 몸을 추썩인다. 사천만의 국민가요 ‘찔레꽃’을 함께 부르자고 선창을 했다. 앉아있던 회원들이 너도나도 일어나 합세를 한다. 어느덧 내 목소리는 간데없고 찔레꽃 둔덕 같은 목소리가 합창으로 울려 퍼진다.
올해도 섣달 끝물 밤에 ‘찔레꽃’은 활짝 피어났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송가 / 장타관 (0) | 2012.03.06 |
---|---|
[좋은수필]운현궁, 그 아픈 뜰에 서서 / 김광영 (0) | 2012.03.05 |
[좋은수필]늙은 감나무 / 박혜숙 (0) | 2012.03.03 |
[좋은수필]종말을 상징하는 빛 / 천경자 (0) | 2012.03.02 |
[좋은수필]이별 연습 / 안재진 (0) | 2012.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