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감나무 / 박혜숙
초겨울 하늘이 비어 있구나. 그 빈 공간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너는 어쩌면 한 톨 미련도 없이 잎을 다 털어 버렸니. 노인의 손가락처럼 살집 없는 가지에 걸쳐 놓았구나, 한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올려놓았었던 그 자리에, 꺼칠한 나무껍데기 속엔 내년 봄에 다시 깨어날 생명이 있기나 한 거니?
너는 정이 참 많았지. 우리 집 나무라고 뻐기던 나와는 달리 동네 아이들에게도 언제나 가슴을 열어 주었어. 다른 감나무에 비해 가지가 사방으로 낮게 벋어서 아이들이 올라앉기 편하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지. 겁이 많은 나는 그 중 가장 낮은 가지를 차지했지만 간혹 용기를 내어 두어 가지 더 높은 곳까지 오르기도 했어. 장에 간 엄마나, 할머니 생신을 보러오는 고모들을 기다리던 날, 저 멀리 승지골 언덕을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면 한달음에 달려갔지. 그럴 때 내 바람과 설렘을 알아차리고 너는 짐짓 웃었지. 감꽃을 줍던 작은 손과 그네를 타던 아이의 흩날리던 머리카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
너의 외모는 참 수려했어. 집 주위에는 다른 감나무도 많았지만 유독 너를 사랑했던 것은 둥글게 펼친 그 넉넉한 품 때문이었어. 사방으로 고르게 벋은 가지에 왕성하게 잎을 달고 있던 모습은 마치 커다란 우산 같았단다.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할아버지의 회갑 때는 너를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었을까. 콩밭 몇 이랑을 뭉개가며 찍은 사진에는 수십 명의 가족 친지들을 품어 안은 네 모습이 아주 멋있었단다. 대청마루에서 병풍을 두르고 찍은 사진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 걸어두고 보았지.
네 덕은 또 어떠했니. 가지가 휘어지도록 많은 열매를 달아서 여름부터 우리들을 흐뭇하게 했지. 비바람 치는 날에는 툭, 툭 풋감도 떨어뜨려 주고, 충해를 입어 말갛게 미리 익은 연시로 방과 후에 궁금하던 입을 즐겁게 해주던 걸 난 잊지 못한다. 채반에 널어놓은 곶감의 수가 줄어드는 까닭은 너는 알고 있었겠지. 반쯤 말라 말랑말랑한 감의 달콤한 향내에 살그머니 장독대를 드나들던 아이들을 내려다보았을 테니까. 한겨울에 설겅설겅 얼음이 든 홍시를 먹는 소리도 창호지문 틈으로 들었을 거야.
수확이 끝나면 아버지는 네 둘레에 구덩이를 파고 뒷간에서 거름을 퍼다 주었지. 아무도 찾지 않는 엄동에 너는 그 거름을 빨아들여 혈관을 통해 온몸 구석구석 실어 나르며 지친 몸을 살찌웠지. 네가 그렇게 추운 겨울을 견디고 있을 때 우리는 너를 까맣게 잊고 따듯한 아랫목에서 또 다른 놀이에 빠져 지냈지. 봄이 오고 감꽃이 필 때서야 다시 너를 반기기 시작했어.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밀거적 깔아놓은 네 짙은 그늘 속에 누우면 한꺼번에 발악하듯 울어대던 매미의 울음도 시원한 물소리처럼 들리던 걸.
그러나 언제부턴가 너는 차츰 야위어 가고 있었지. 그 튼실하던 가지와 무성하던 잎이 성기어지더구나. 수명이 길고 그늘이 짙다고 옛사람들은 너를 칭찬했는데 이젠 그 칭찬도 비껴가겠구나. 벌레가 덤비지 않고 새가 둥지를 틀지 않는 것도, 맛있는 열매와 고운 단풍도 네가 사랑받던 이유였지. 그 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니 마땅히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치를 알고 행하는 정신도 역시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어. 하나 이젠 그 모든 예찬이 지나간 영화일 뿐이겠구나.
문득 초라한 너를 발견하였을 때, 난 그저 세월 탓인 줄만 여겼지. 아이들은 커서 집을 떠나고, 어른들은 바빠서 네 열매조차 거둬들이지 못한 채 세월이 갔지. 먹을 것이 흔해지고 높은 가지에 있는 열매를 따는 일도 번거로우니 거름을 주던 아버지의 손길도 멈췄구나. 더 이상 너는 몸을 살찌우는 일도 열매를 여는 일도 의미가 없어졌겠지. 마지못해 매달린 열매는 그 크기며 모양이 부실하기만 하더라. 튼실하고 수려하던 몸도 더러는 삭정이가 되어 떨어져나가고 몇 안 남은 가지로 뻘쭉하니 서서 고향 마루턱을 지키고 있구나.
어디 너뿐이랴. 농촌에는 쇠잔한 노인들만 남아 기울어져 가는 집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도 젊어서는 예전의 너처럼 의욕이 왕성하던 시절이 있었지. 아침마다 손 벌리는 자식들에게 공책 값 한 푼이라도 더 건네주려고, 못 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등이 휘도록 일을 했어. 보리밥 한 숟가락, 삶은 감자 한 알이라도 더 먹으려고 게걸대던 아이들을 치다꺼리하는 것이 어찌 버겁지 않았으랴. 어느 하루 쉬어 본 적 없이 그리 분주하게 살았어도 그게 낙이었고 살아가는 힘이었지.
그러나 이제 장성한 자식들은 둥지를 떠났어. 안팎으로 뛰어다니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긴 집엔 문고리가 녹슬고, 댓돌이 주저앉았어. 한 귀퉁이가 기울어진 낡은 헛간 앞에선 심심한 강아지만 근력 없는 주인의 발꿈치를 따라다니지. 행여나 하고 열어둔 대문으로 찬바람만 휘휘 들어오는 걸. 내 입에 넣을 밥을 짓는 일은 흥이 나기는커녕 서럽기만 하지.
며칠 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던 눈빛이 생각난다. 판잣집 어둑한 단칸방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던 노인의 건조한 눈빛. 기쁠 일도 없고 서럽지도 않은 날들. 그도 젊어서는 꿈을 위해 살아가던 날들이 있었으리. 자식들 키우느라 힘들었던 고생도 고된 줄 모르고 행복했을 테지. 희망을 품은 가슴엔 기쁨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살아 있으니 살고 있을 뿐이야. 의욕과 희망은 저희끼리 손잡고 벌써 북망산을 넘어갔어.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조차 부질없음을 아는 허망한 눈빛뿐이야.
지금 너의 모습에 노인의 잔상이 겹쳐진다. 냉기 가득한 허공에 떨고 있는 너를 보면서 주머니 속의 손가락이 시려오는구나. 어린 시절 지기지우로 지금도 내 추억 속에선 혈기 왕성한 모습으로 살아 있는데. 이렇듯 쇠약한 모습을 마주하니 마음이 편치가 않다.
어느새 어머니가 마당에 나와 계시는구나. 모처럼 찾아온 딸을 좇아 그새 지팡이에 의지하고 나오셨어. 너는 아마 기억하겠지. 젊은 날의 어머니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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