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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종말을 상징하는 빛 / 천경자

종말을 상징하는 빛 / 천경자

 

 

 

누군가 새해를 맞이한 나의 좌우명 같은 것을 말해보라 했지만 감각이 무장아찌처럼 퇴색해 버렸는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안의 희망과 의욕이 고갈되어 버리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현실과 과거와 미래가 함께 내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젖어 드는 때가 많다. 제법 그럴 듯한 좌우명이 떠오르는 것 같다가도 다음 순간 내 속에 있는 과거와 미래가 그것을 지워 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 과거란 어떤 사연들이 아니다. 가령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아기자기한 그리움이라든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초스러웠던 회상 따위가 아니고 분홍색 양산이나 화란에서 흘러들어온 듯한 하얀 레이스 조각 같은 사물이 선명하게 나의 망막 속에 박혀 있으면서 현실의 농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미래의 상징이라고 할까. 외계인과 부처님 상을 합친 듯한 인물이 눈부신 금빛 옷을 걸쳐 입고 등장해서는 남아 있던 나의 현실감각을 마저 지워 버리고, 마지막에는 눈앞에 하얀 집이 떠오른다.

숱한 사연을 안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던 내 지난 날이 활짝 분홍색 양산이나 레이스 한 조각으로 대체된다고 생각하면 텅 빈 느낌을 가눌 수 없다. 그 공허한 과거를 업고 현실을 디디며 무겁고 눈부신 미래를 잡아당겨 나는 숨쉬고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에 어머니 따라서 휘주라는 아이 집에 갔다가 본, 그 집 선반에 펼쳐져 있던 장난감 같은 양산과, 어느 날 예배당 단상에서 찬송가를 가르치던 서울에서 내려온 신여성의 치마에 비친 속치마 끝 레이스가 내 과거를 대표하여 떠오르는 것인데,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아이 기르고 학교 선생 노릇하며 여자로서 가장 알차게 살았다고 여겨지는 지난 30대의 그리운 사연들이든지, 감로수처럼 갈증을 풀어 주었다고 생각되는 작은 영광 같은 것이 지금에 와서는 흘러간 영상을 보듯 남의 일 같기만 하고 희미하기만 하다. 나이 들면 과거란 으레히 허무해지는 것이려니…….

그래도 나는 모래탑 속에 들어앉아서 남아 있는 인생을 향해 나머지 모래탑을 마저 쌓아 올리기에 열중한다. 이제 나는 내 그림을 금색, 동색으로 물들여 보고 싶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표정에 부처님 같은 싸늘함이 깃들게 하겠다. 지나고 나면 또다시 모래탑이 될 지라도.

그렇다면 내 마음 속에 부각되는 하얀 집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하얀 페인트 칠을 한 납작한 케이크 같은 집을 신촌에서 보고, 아현동 고개에서도 보았다. 분명 레스토랑이 아니면 찻집이겠지만 나는 그런 집이 택시의 차창을 스칠 때마다 전세와 내세가 깜박깜박 연상되어 오고 모체회귀 같은 야릇한 향수에 젖게 되는 것이다.

그 하얀 집에 들어가면 메리메나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차를 마시고 있을 것만 같다. 언제고 한 번은 그 집을 찾아가 보려 한다. 그러나 아직은 갈 수가 없다. 어슴푸레하게나마 그 곳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스페인 말로 ‘카사블랑카’ 라고 하는 하얀 집은 모로코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 이 납작한 케이크 같은 하얀 집들은 카사블랑카는 물론 아가딜이라는 해안 마을에도 많이 있었다.

필경 그때 보았던 강렬한 인상 때문에 분홍색 양산이나 레이스 조각이 과거의 상징이듯, 하얀 집은 역시 빈털터리인 나의 미래, 나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