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가지에 꽃댕기 / 은옥진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월매이곡병(月梅二曲餠)을 다시 펼쳐놓은 것은 지난겨울 일본을 다녀온 뒤였다.
해묵은 굵은 둥치가 비스듬히 그려졌고, 옆으로 뻗은 가지에는 흰색 꽃들이 피어 있다. 그루터기에 핀 파르스름한 이끼는 예스러워 운치를 더하고, 해맑은 향이 번져 오는 것만 같다.
지난해에 남편과 같이 일본의 규슈의 작은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일찍 잠이 든 때문인지 자정이 지나 눈을 떴다. 방안이 환했다. 날이 밝았나 싶어 엷은 커튼을 젖히니, 창 밖은 고즈넉했고 사위에 달빛만 푸르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디선지 향긋한 내음이 방안 가득 새어든다. 슬며시 창을 밀쳤다. 잊고 재냈던 꽃내음이었다. 궁금한 마음 가눌 길 없어 남편을 깨웠다.
밖으로 나오니 저만큼 떨어진 비탈에 작은 텃밭이 있고, 그 곳에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었다. 얼핏보기에 옥색 너울을 쓰고 있다 할까.
흰색 매화였다. 꽃잎 하나만 날려도 그 소리가 들릴 듯 가라앉은 밤, 달빛 부서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윽한 향기는 매화의 품격이며 묵언의 시(詩)일진대, 설혹 시린 바람이 지난다 해도 후회될 것 같지 않았다. 매화가지 흔들며 봄을 일구고 있을 것이기에.
격이 있는 한 그루 매화를 늘 마음에 그리고 있었는데, 달빛 어린 매화를 만날 수 있었으니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을까. 남편의 성화 때문에 방으로 들어오면서도, 행여 시새움으로 세찬 바람 일어 꽃잎 날릴까 돌아보고 다시 보며 걸음을 옮겼다.
처음 그 방에 들어섰을 때는 허술한 유리문을 보며 염려도 했었건만, 생각해 보니 밀폐된 현대식 건물이 아니었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잠을 깨운 달빛과 꽃내음을 고맙게 여기며 매화를 노래한 소동파의 시구를 떠올렸다.
남해의 신선이 사뿐히 내려와
달밤에 흰옷 입고 와서 문을 두드리네
옛 선비의 풍류는 짐작만 할 뿐, 내 가슴에 고인 그 시정을 읊지 못하는 애석함으로, 새벽이 다하도록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아쉽지만 옷에 밴 향기와 달빛을 안고 돌아왔음을 만족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 앉은 남편은 여관 주인에게 매화나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내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물어주었다.
이야긴즉 이러했다.
그 마을에 사는 처자와 혼인을 한 가난한 젊은이가 처가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새색시가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딸을 낳으면 매화나무를 심자고 했던 언약을 떠올리며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작은 밭을 샀다. 그리고는 색시가 열일곱 해를 보낸 친정집에서 매화 한 그루를 가져와, 그 밭에다 심었던 것이다. 덧없이 피었다 지는 매화처럼 두 해를 살고 간 그녀를 기리며.
그날 이후, 매양 꽃 때가 되면 매화나무는 기약 저버림 없이 꽃으로 피어 그를 찾아오고, 그는 붉은 댕기를 꽃가지에 매달아 애긇는 정으로 그녀를 맞이한단다.
어젯밤 꽃가지에서 나폴대는 리본을 보았는데 바람에 날아온 헝겊 조각인줄 알았을 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젊은이의 나이가 늘어갈수록 수형은 더욱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꽃은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어서 가끔씩만 다녀간다고 한다.
어디 늘 피어 있는 꽃과 견줄 수 있으랴. 다음해를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을 것이니, 낙화를 바라보는 노인의 마음이 어찌 애달프지 않을까.
떨어진 꽃잎 하나도 밟을 수 없어 살며시 주웠다.
‘매는 내 처요. 학은 내 아들’이라며 평생 매화와 함께 살았던 중국의 임화정처럼. 그도 아내를 기리며 매화를 바라보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무처럼 쉽게 전성하지 않으니 고귀하고, 꽃봉오리가 활짝 피지 않아 단아하며, 해가 갈수록 그루터기에 격이 생기고, 찬 서리 이겨내 묵은 가지에서 꽃을 피우니, 그 선정을 절개의 상징으로 여인들에 비유되었으니 그 옛날 시인 묵객의 마음을 끌었던가 보다.
옛 여인들 또한 매화를 새긴 매화잠을 머리에 장식하며 일부종사의 미덕을 지켰다는데, 그 매화나무의 주인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마을의 어느 나무보다도 먼저 꽃 소식을 전한다는 그 매화나무는, 그녀를 기다리는 임에게 어서 오고자 매화 가제에 봄을 실어 달려오는 가보다.
다시 봄이 오고 매화를 추억할 때면, 안방에 놓인 월매도(月梅圖)를 바라보며 그 때의 매화나무와 그 가지에 매달린 꽃댕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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