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기에 아름다운가 / 장호병
세모의 동동걸음이 블랙홀에 빠져들 듯 한층 더 바빠졌다. 연초의 여유에 비하면 조급하다. 그리운 것들은 켜켜이 쌓여있지만 반추할 겨를이 없다. 설을 맞는다고 달라질 거야 나이 한 살을 더 얹는 것 말고 무엇이 더 있겠는가. 산모롱이를 돌아 오르면서 땀 훔치듯, 한 굽이씩 또 하나의 매듭을 짓는다. 가고, 오는 게 교차하는 점이 설이다.
설이 되어야 새 옷이 생기고 새 양말이라도 신을 수 있어 손꼽아 기다렸던 때가 있었다. 섣달그믐 무렵, 아버지 형제가 없는 우리 집은 오히려 쓸쓸했던 것 같다. 친구의 삼촌들이 며칠 전부터 귀향하여 함께 연을 날리기도 하고 스케이트도 만들어 주는 것을 보면 가슴 한쪽에서 진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아버지께서도 홀로아들의 외로움을 아셨기에 자식 욕심이 많았으리라.
할머니께 세배 온 아버지의 친구나 낯선 이들로부터 간혹 세뱃돈을 동전을 얻을 때가 있었다. 매우 드문 경우였다. 땅 위에 놓고 발뒤축으로 밟아 한두 바퀴 빙그르 돌면 동전은 어느 사이에 반짝반짝 눈이 부실 정도로 윤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우리 식구만도 스물을 넘는 대식구가 되어 설을 맞는다. 형제며 조카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편의를 위하여 고향이 아닌 객지에서라도 한 자리에 모이자 다짐하지만 한두 집은 빠질 때가 잦다. 작은 선물에도 고마워하는 형제들이기에 양말 한 짝을 준비하는 일도 즐거웠다. 그것도 잠시, 물질의 풍요 속에서 손수건 한 장이라도 명품이 아닐 바에야 어떤 선물도 현금만 못하다는 것을 익히 알아서인지 요즘은 형제간의 선물 건네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뿐만 아니다. 조카들에게도 세뱃돈으로 어른 구실을 대신해야 한다. 아이들이 어른의 숫자보다 적고 자주 보지 못하니 오히려 어른들이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에 바쁘다. 그러다 보니 분에 넘치는 세뱃돈이 오가기 일쑤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덕담에 귀 기울이기보다 서로의 세뱃돈의 많고 적음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어떤 해는 형들이 받은 액수에 미치지 못하여 샐쭉이는 어린 것들의 투정에 온 가족이 박장대소하며 대견하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돈맛을 알면서부터는 아이들이 촌수보다는 세뱃돈의 많고 적음으로 친소관계를 받아들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수 년 전 미국에서 코리안드림을 이룬 한국 여성 기업가 김태연 회장의 설날 풍경이 텔레비전에 방영된 적이 있다.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왜 못해!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라는 그녀의 좌우명과 함께 매우 인상적이었다. 혈혈단신의 그녀는 미국에서 마약중독자나 마피아 등을 양자로 삼아 한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고 아직 나이 어린 청소년들도 있어 나이 차가 다양했지만 새해 첫날 아침 그녀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뱃돈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그 속에는 빳빳한 1달러와 덕담을 적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적은 돈이지만 소중하게 생각하고 함께 들어있는 덕담에 무게를 두는 그들의 생활 자세에 크게 고무되어 나도 실행에 옮기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째째한 어른’으로 비춰질까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
영화 ‘상류사회’에 출연했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동료인 프랭크 시나트라로부터 2달러짜리 지폐를 선물로 받은 후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다. 이후 이 지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화폐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다. 내가 한국은해 총재라며 소장하기만 해도 행운을 가져다주거나 꿈을 이루게 하는 이천원짜리 지폐를 찍어보고 싶다. 세뱃돈으로, 수능 전일, 그 외에도 특별히 격려해주고 싶은 날 행운을 담아주는 지폐로 소장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돈은 1,2년 이내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쓰여지도록 하는 행운의 화폐를 만들고 싶다.
내 몸에서 윤기가 빠져나가듯이 아름다운 것들은 왜 다 바스러져야 하는지 마음이 아프다. 한 해를 맞는다는 것보다 보낸다는 데로 무게 중심이 쏠린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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