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眼目) / 김초성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왔다. 신세계백화점이 개업을 기념으로 ‘팝 아트 전시회’ 를 기획한 덕분이다. 벼르고 별러 마감 이틀 전에 현대 미술의 거목이라는 그들의 작품을 겨우 만났다. 판화와 회화 작품 중에 「눈물 흘리는 여인」이 제일 먼저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재벌 부인이 재테크 목적으로 사들였다가 검찰 수사로 유명세를 치른 작품인 「행복한 눈물」의 사촌을 만난 셈이다. 90억이란 거액의 경매가에 구입했다는 그 작품이 지금은 3~4배를 호가한다고 한다.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투자 자치로 바뀌다니 역시 사업가의 눈은 다른가 보다. 애석하게도 그림에 문외한인 내게는 그저 만화 캐릭터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니 어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웃고 있는 소녀의 눈물 속에 무슨 사연이 젖어 있을 지 눈(眼) 속을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시선을 옮겼다.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현대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뉴욕 할렘가의 어느 벽에서 보았던 만화 그림을 닮았다. 그는 처음에 휴지통에 버려지는 하찮은 광고 전단지나 보잘것없는 포장지, 상품 카탈로그 등에서 발상과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개성은 대중적인 다양한 소재를 캔버스에 옮겨서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게 한 점이랄까. 항상 사물의 뒤에 있는 무엇을 찾았다. 남다르게 눈을 밝힌 결과물이 세계적인 예술로 태어나게 했나 싶다.
대중예술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안목과 기발한 아이디어를 모르는 까닭일까. 일상적인 것을 굳이 장소만 바꾸어 전시하면서 예술로 승격시킨 뒤쌍의 뒤를 따른 앤디 워홀의 구상이 내 정서에는 아직은 맞지가 않다. 마릴린 먼로, 마가렛, 체 게바라, 모택동, 마이클 잭슨, 꽃 등. 관람자의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채색의 변화가 연이어 이어진다. 마치 컬러 인쇄술의 변형을 전시한 포스터랄까. 나는 변용의 행위를 창작이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덩달아 작품을 극찬하며 호평하는 미술평론가의 말재주도 왠지 뜨악하다. 작가의 수준과 상관없이 때때로 그림에 대한 열정이 좌지우지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 눈에 안 차기에 싫어지는 옹졸함일까. 예술 작품으로 보는 감성이 일지 않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아는 만큼 눈에 보인다는 말이다. 나의 팝 아트에 대한 감상 수준은 느낀 대로 보고 말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미사여구로 의미 부여를 할 것까지야 없다는 평소의 지론을 떨치지 못한다. 작품 속에 몰입되어 본 적이 없었으니 그냥 좋고 아름다운 대로 즐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위로해 본다.
안목(眼目)이란 한자(漢字)에서 나는 여덟 개의 창을 본다. 사물을 들여다 보는 눈이 여덟 가지로 보일 수 있다는 뜻으로 새긴다. 눈으로 보고 두뇌로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라는 얘기일 것도 같다. 매사를 대충 보고 마는 내 눈을 창을 통해 다른 눈으로 뜨게 한다.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의 눈, 앞을 내다보는 눈, 새롭고 참신하게 보는 눈, 근질거리는 오감으로 바라보는 눈, 끊임없이 착상을 떠올리는 눈, 고집스러운 눈, 욕망으로 끌어들이는 눈, 반 전문가가 되어 보는 눈, 하나는 무언가?
나의 문학적 결핍을 ‘안목이 없어서’ 라는 변명으로 대신할 때가 있다. 소재를 찾지 못할 땐 그 변명이 더욱 그럴싸하다. “문학은 괴물” 이라고 말한 어느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괴물에 완전히 빠져들지도 못한다. 그렇다 해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신세인 셈이다. 이 괴물은 내가 아주 미쳐 버리거나 조용히 요양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이별하거나 그 중 하나를 택할 것을 채찍질한다. 끊임없는 아이디어 발굴 작업에 몰두하는 정신을 흉내라도 내 봤는지 자신에게 묻는다. 괴물의 소굴에 빠져 봐야 괴물을 이길 수 있을 터이다.
백남준은 티브이 모니터에 그림을 가져왔다.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그의 표현은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입고 있던 바지를 갑자기 바닥에 흘려내린다든가, 그의 친구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즉흥적 전위 행위는 코믹하다. 티브이 모니터가 거북이도 되고 호랑이도 되었다. 어떻게 세종대왕을 모셔오고 정약용을 불러올 수가 있을까. 상상을 뛰어넘는 이러한 착상은 시대를 앞서 가는 선구자적 예술가의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작품 「다다익선」에 천 개가 넘는 모니터가 눈이 되어 말한다. ‘작품을 바라보는 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제각각 많을수록 예술은 풍요로워진다’ 라고.
새롭게 보려는 안목으로 현대 미술을 감상하며 생각한다. 더 넓고 더 깊게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위한 안경 하나 없을까. 눈을 크게 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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