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연습 / 안재진
길을 나섰다. 별로 갈 곳이 없다. 텅 빈 들녘 길을 따라 떠밀리듯 발길을 옮긴다. 겨울 문턱에 들어선 햇살이 조금 떨어진 산기슭을 더듬는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텅 빈 가지들은 게으른 춤을 춘다. 햇빛 속에 섞여 몸살을 하듯 일렁이는 바람결이 부추긴 모양이다.
도대체 그 춤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기쁨이라 보기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다. 세상 모든 걸 잃어버린 채 하늘을 향해 빈 몸으로 서 있는데 그게 무슨 기쁨의 율동이겠는가. 아니면 세상살이에서 빚어진 온갖 시련을 털어버리고 이제 홀가분한 기분으로 길을 떠날 수 있다는 마지막 연회의 무도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어제는 어머님 기일이었다. 큰집 조카가 미국으로 잠시 떠나 살기에 그 곳에서 제사를 올릴 것이라 믿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산소를 찾았다. 머리를 조아려 참배를 올린 후 이미 말라비틀어진 잔디밭에 쓰러질듯 앉아 마주 보이는 서녘 하늘을 응시했다. 동짓달 짧은 해는 오후 3시가 조금 지났는데 벌써 어둠이 밀려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산 위에서 바라본 서녘 하늘. 햇살은 더욱 붉은 빛으로 유봉산 자락에 누워있고, 그 위로 아직 길을 떠나지 못한 철새 몇 마리가 무거운 날갯짓으로 군무를 이루었다. 금호강을 가로지른 철길 위로는 지친 디젤 기관차가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었다. 황혼을 싣고 달리는 기차는 그림자를 떨구듯 스산한 뒷자리를 남기며 쓸쓸히 멀어져 간다.
어머니는 삼십대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 유택을 정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을 않아왔다. 그 아픔 밑바닥에는 존재에 대한 애착과 삶의 그늘, 지금쯤이면 기쁨을 찾아드릴 수 있을 것이라는 보상 같은 환상이 깔려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만 떠올리면 항상 슬픔이 묻어있는 회색빛 공간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한 평 남짓한 어머니의 무덤이 그렇게 평화롭고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진 나목들의 자유처럼, 칙칙하고 고뇌스럽던 삶의 찌꺼기를 벗어던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황량하게 잠들어 있는 들녘의 망각처럼. 어머니의 정지된 세월이 무척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새롭게 다가선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며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어찌하여 가련한 어머니의 모습이 행복한 모습으로 반전되었을까 하는 내 의식의 질문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무언가 잃고 있는 내 외로움 때문이라 할까. 세월을 잃어가고, 젊음을 잃어가고, 가슴을 뜨겁게 했던 사람들을 잃어가고,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는 초조감 때문일까. 그것이 내일일지 아니면 일 년 후가 될지, 오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내 옆을 떠나간 것처럼 나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나는 요즘 그런 분명한 사실을 엄숙히 맞이하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근간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니다. 오십대 후반부터 짬짬이 생각하면서 서서히 버리는 연습을 한 것이다. 다만 그 때의 연습이 여유 있는 행동이었다면 지금은 진지하면서도 절박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일거리가 있는 사무실을 벗어나 이렇듯 하늘과 바람, 햇살과 나무, 시들어 있는 들풀과 허무가 깔려 있는 먼 들판길을 산책하는 것이다.
어느 사이 낮달이 야트막한 야산 나뭇가지에 걸린다. 서산마루에는 아직 저문 해가 뿜어내는 붉은 운무가 삶의 미련을 털어내지 못하고, 이를 지켜 본 반월은 안타까운 연민으로 미리 나와 전송하는 것 같다. 문득 해도 달도 모두가 나를 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나만이 엉뚱한 세상에 나둥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시간에는 또한 무언가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살아있는 죽은 자 같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아무런 미련 없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마음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언제쯤이면 사람이 없어도 외롭지 않고, 어둠 속에 갇혀 있어도 불안하지 않고,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도 당당할 수 있고, 사랑이니 영광이니 행복이니 하는 것들을 한갓 휴지 조각처럼 무심히 던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또 이 길을 얼마나 더 많이 걸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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