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송가 / 장타관

송가 / 장타관

 

 

 

빠르다는 KTX가 오늘따라 느렸다. 뒤로 가서 그럴까. 급한 마음에 남은 표를 끊은 게 역방향의 좌석이었다. 친구의 부음을 받고 깜짝 놀라 긴가민가하던 나는 하던 일을 다 밀쳐놓고 오후에 서울행 기차를 탔다. 내게 둘도 없는 친구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러 가는 길이다.

지난 가을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진료를 받으러 가는 S병원에서 였다. 서로의 건강도 염려하며 찾기 쉬운 곳에서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삭정이 같이 마른 그가 약속 시간보다 좀 늦게 낯설게 다가왔다. 한 손엔 지팡이를 짚어서 그런지 걸음걸이가 둔하고 말도 어눌했다. 의자에 앉아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자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땀을 닦는 그를 보니 머리털이 다 빠졌고 여러 곳에 함몰된 자국들이 드러났다.

그는 외래 진료를 받기위해 가족들과 병원에 가는 일 외에는 첫 외출이라며 숨을 몰아쉬었다. 혼자는 절대 가지 말라는 처의 손을 뿌리치고 왔다는 말에 고맙기도 하고 은근히 걱정도 되어 미안했다. 몇 년 전 길을 가다 쓰러져 머리에 큰 수술을 받은 후 나와 첫 만남이었다. 늦은 점심 후 그는 일어서면서 몸이 나으면 금호강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안보는 게 나을 텐데 하며 그의 실망하게 된 표정이 퍼뜩 떠올랐다.

이삼 년마다 새로 바뀌는 내 수첩의 첫 페이지에 늘 이름이 올라있는 그는 고등학교 친구다. 누가 뭐래도 그와 나는 겉으로 봐선 영 어울릴 사이가 아니었다. 거미 다리같이 마른 그는 키도 나보다 삐죽이 더 컸고 얼굴은 희고 둥글넓적한 귀공자 타입이었다. 색 바랜 교복만 입었던 나는 그가 늘 입고 오던 날이 선 검정색 ‘사지’ 양복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내성적이라 말수가 적은 그는 몸이 약해서 내게 늘 힘이 밀렸다. 옷이 걱정되었는지는 몰라도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 뒤쪽에서 내가 하던 철봉 운동을 흥미롭게 봤다.

우리 학교 가까이에 있던 그의 집은 방과 후 모여드는 나와 몇몇 여드름들의 아지트였다. 쇠도 녹일 나이에 얻어먹은 식은 밥 한 덩이는 씹을 새도 없이 넘어갔다. 싹싹하고 예쁜 그의 여동생들을 보고 나면 이튿날 아침부터 괜히 싱글벙글 기분이 좋았다.

첫 여름 방학이 되고 몹시도 더운 어느 날이었다. 그가 혼자 우리 집에 왔다. 나는 얻어먹은 죄도 있어 되갚을 기회로 삼았다. 지금처럼 TV나 냉장고,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밖으로 나갔다. 그때 자연은 나의 놀이터였고 늘 살아있는 삶의 스승이었다. 내가 자주 가던 금호강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그를 데리고 거기에 갔다.

수정 같은 맑은 물속엔 물고기가 천지였다. 얕은 물속에 들어가 가만히 누워 있으면 물고기들이 다가와 작은 입으로 몸을 톡톡 건드렸다. 그는 간지럽다며 가끔 몸을 오므렸다. 나는 나무 막대기 하나 쥐고 피라미 여러 마리를 잡고 발로 모래를 갈아 살찐 모래무지도 잡았다. 그리고 물기 있는 모래밭에 난 구멍에서 조개를 주울 때는 그가 나보다 더 앞서 갔었다. 숨이 차면 물 밖으로 나와 온 몸에 모래를 묻히며 뒹굴며 쉬기도 하고 띄엄듸엄 모여 앉은 고만고만한 뜨거운 자갈들에 까치발로 돌아다니다가 얼룩덜룩한 물새알을 줍기도 했다. 간혹 물새알들이 부화된 것도 모르고 삶아 빨간 핏줄이 보이면 허망함과 죄책감도 함께 느꼈다. 목이 마르면 모래 샘을 파고 물위에 뜨는 마른 모래를 입으로 후후 불며 엎드려 마시기도 했다. 그는 내가 하는 짓이 신기하고 즐겁다며 내 뒤를 바짝 따라 다녔다. 입이 심심하면 강 건너 사과밭은 내 밭이었고 간혹 주인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귀리 밭에 몸을 숨겼다. 그럴 땐 숨었던 나보다 밖에서 망을 보던 그가 더 겁을 먹고 빈손을 허공에 저으며 나를 재촉했었다. 밤이 되면 습한 들판에서 살아있는 온갖 것들의 크고 작은 소리가 모여 어둠을 노래할 때 얼굴에 날아드는 하루살이들을 손바닥으로 저으며, 미래를 꿈꾸며 터덜터덜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그 소리는 우리가 가까이 갈 땐 끊어졌고 지나고 나면 일제히 제각기 가른 음색으로 합창을 했다. 어느 속에는 날갯짓 소리가 나기도 하고, 첨벙하며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도 났다. 우리의 행진은 한 밤의 광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우리도 질세라 냇킹콜의 모나리자, 투영, 펫분의 에이프릴 러브를 흥얼흥얼 부르며 화답했다. 돌아와 묻은 흙을 씻고 전등을 끄면 잠자리가 비좁고 낯설어도 그는 곰팡이 냄새 나는 눅눅한 내 방에서 이내 깊은 잡에 빠져 들었다. 즐겁기도 하고 겁나기도 한 시간이 이어가자 그는 해마다 우리 집에 왔고 나의 질긴 짝으로 감겨왔다. 그렇게 여름날을 맨 몸으로 보내는 동안 우리의 등과 팔은 따가운 햇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한해 세 번씩이나 뿌연 허물을 벗었다.

어느 해인가 한번은 그가 한 길 넘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내가 잠시 내민 손에 그렇게도 고마워하면서 또 한번 스며들듯 다가왔다. 대학 1학년 체육시험 때다 턱걸이 한 번이 기준이었다. 그는 해낼 수 없는 시험이었다. 내 차례를 먼저하고 일부러 뒷줄에 섰다. 교수님이 내 얼굴을 잊을 때쯤 나는 그의 이름으로 두 번째 철봉을 잡았다. 교수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눈치였지만 내 이름을 알지 못했다. 같은 해,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먼저 취직하자 그는 원근을 가리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집집마다 전화가 없어 할 말이 밀리면 내가 숙직하는 날 밤에 사무실로 이야기보따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는 난로에 연탄재를 갈아가며 우리들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보다도 더 길었다. 여드름 하나가 그의 여동생과 결혼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 후 온가족이 서울로 솔가하고도 그는 우리 집 길흉사에는 새벽같이 달려와 주었다.

영정사진을 보자 “왔나” 하고 금장이라도 걸어 나올 것 같다. 그의 힘겨운 숨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향을 꼿고 술 한잔 치자 뜨듯하게 치받치는 눈물이 왈칵 났지만 애써 참았다. 마음은 슬픔을 억누르고 손과 몸은 의식을 따랐다. 양옆에 선채 고개를 숙인 유족들을 보자 슬픔이 내 목구멍을 또 다시 막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떠나 올 때 가져온 사진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아들 딸 앞에 내어 놓았다. 아주 작은 흑백 사진이다. 그와 내가 달성공원에서 관풍루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나는 군복차림이었고 그는 옆집에서 온 듯 흰 고무신을 신고 소나무에 기대섰다. 그 사진을 보자 모두 참았던 눈물이 일제히 봇물처럼 터졌다. 보고 울고, 울고 보고 서로 돌려가며 청년 지아비를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휴대폰에 여러 번 담았다. 한참 후에 눈물로 얼룩진 사진을 쥐고 차마 돌아설 수 없는 무거운 마음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몰랐을 것은, 차라리 몰랐을 것을. 그가 없는 내 마음은 정말 허전했다.

그와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볼트 너트였다. 누가 볼트고 누가 너트였든가는 가릴 필요가 없다. 아무 거라도 좋다. 우린 여태까지 서로를 향하여 홈을 조이기만 했으니까. 켜켜이 쌓인 우정의 땀과 때가 돌돌말린 홈에 끼어 분리될 수 없도록 비녀장이 되었나 보다.

부모와 처자식도 모르는 서로의 비밀을 가슴에 안고 간 친구야! 내 이제 너를 내려 놓는다. 함께 한 시간은 여기까지다. 좋았던 시간보다 소홀했던 잠깐이 후회로 남는다. 인생의 무게를 뜨거운 불 속에 내려놓고 한 줌 재가 되어 소나무 밑에 잠든 친구야. 내 가슴의 울림이 들리느냐? 이다음 수첩의 첫 페이지 맨 위 칸은 빈자리로 남겨 둘게. 유명 선수들의 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두듯이 말이다.

우리가 그토록 좋아했던 여름은 막 다가설 듯 앞에 와있단다. 네가 다시 와보고 싶다던 금호강에 오늘 나 다시와 강 한복판 어디쯤에서 까맣게 그을린 네 모습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