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백(白) 목련 / 임만빈

백(白) 목련 / 임만빈

 

 

 

2월 중순에는 목련나무에 꽃눈이 돋는다. 꽃눈은 붓 모양을 하고 솜털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솜털로 덮인 붓 속에는 연초록빛을 띤 흰 꽃잎이 겹겹이 포개져 3월의 햇빛을 고대하고 있다. 귀를 기울여 보라. 움트는 소리가 들린다. 솜털을 주시해 보아라. 발로 차는 아기의 발길질에 솜털들이 움직이지 않는가? 붓끝을 트고 꽃잎이 터져 나올 때 태생의 아픔은 차라리 환희의 절규로 들릴 것이다. 가지를 타고 흐르는 생명수는 엄마의 태반을 통한 제대(臍帶)의 피처럼 맑고 깨끗한 영혼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양소들은 겹으로 접힌 흰 꽃잎에 말간 영혼을 담아 줄 것이다. 어찌 그저 목련이 피었다며 쉽게 지나칠 수 있을까?

2월 말 목련 꽃눈에 세로로 하나의 흰 줄이 생겼다. 양측이 아니고 한쪽에만 그어졌다. 솜털도 선을 중심으로 하여 양측으로 비켜섰다. 궁전의 대문이 열리면 화려한 꽃 행차가 시작될 것이다. 그 행차를 기다리며 솜털들은 도열해 있다. 키가 커지고 몸통도 굵어진 꽃눈은 봄을 재촉하는 늦겨울 바람에는 살랑대지 않는다. 자식을 품은 어미가 어찌 가볍게 처신할 수 있단 말인가?

삼월 초하루 비 오는 아침 꽃눈이 약간 벌어졌다. 그 사이로 눈을 감고 웅크린 꽃잎이 부끄러운 듯 일부만 보였다. 인턴 때 산부인과를 돌면서 아기를 받던 일이 생각났다. 엄마의 자궁(子宮) 경부(頸部)가 열리기 시작하고 아기의 검은 머리털과 쭈글쭈글한 피부가 삐죽이 보이던 모습이 연상되었다.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모습이 자꾸만 꽃눈 위에 겹쳤다. 비 맞은 꽃눈의 솜털들은 양수(羊水)로 태아의 피부에 붙어 있던 신생아의 솜털같이 꽃눈 표면에 붙어 있다.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꽃눈의 반대쪽에 흰 선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그리고 꽃눈이 드디어 입을 벌렸다. 나는 꽃눈 속에서 비집고 나오는 것이 꽃잎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바깥쪽 꽃순 싸개와 똑같은 또 한 겹의 꽃순 싸개였다. 바깥 싸개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유전자 조작을 한 것인가? 쌍둥이를 잉태한 것인가? 싸개에 돋아 있는 솜털 모양도 똑같았다. 태생이 어찌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겹겹이 보호되고 싸인 꽃의 태아는 아직도 엄마의 자궁 속에서 굼틀대고 있을 뿐이다. 삼월의 따뜻한 태양이 꽃순 싸개 속으로 스며들어 태아를 잡아끄는 날 찬란한 푸른 하늘 아래서 양수로 붙어 버린 두 눈을 번쩍 뜨리라.

어제 오후 퇴근길에는 출근 때와 비교하여 꽃눈이 1센티미터 이상 훌쩍 솟아올랐다. 바깥쪽 꽃순 싸개는 검은 초록색이었으나 안쪽 꽃순 싸개는 연초록색이었다. 따뜻한 봄의 기운을 받은 꽃눈은 생기가 넘쳐흘러 하늘도 찌를 듯한 기상이었다. 그러나 꽃샘추위가 혼자 어젯밤을 독차지한 오늘 아침, 출근길의 꽃눈은 추위에 밤새 시달렸는지 쭈글쭈글하고 생기가 없다. 어찌 인간 세상과 다르겠는가. 만사가 잘 풀릴 때는 생기가 돌고 피부도 팽팽하나, 어려운 시련 속에서는 고개가 숙여지고 어깨가 처지며 피부가 꺼칠해진다는 사실을……. 꽃잎이 안쪽 꽃순 싸개를 트고 밖으로 살짝 비쳤다. 바깥쪽 꽃순 싸개가 벌어질 때와 같이 처음에는 새로로 선을 만들었다. 그것이 벌어지더니 약간 노랗고 연초록색을 띤 흰 꽃잎이 터져나왔다. 안쪽 꽃순 싸개는 찢어졌다. 어젯밤에는 창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봄바람이 드세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창문이 흔들리는 걸거덩 소리는 목련꽃이 진통을 참지 못하고 내는 임산부의 고한 소리였을 수도 있고, 바람에 흔들렸던 가지의 뒤틀림은 산도(産道)를 타고 내려오는 태아의 심술에 고통 받는 엄마의 몸부림 같은 목련나무의 뒤틀림일 수도 있다. 안쪽 꽃순 싸개의 터진 부위로 보이는 꽃잎은 엄마의 수유에 채색된 우윳빛 유아의 피부같이 여리고 맑았다. 참으로 청순하고 깨끗한 꽃잎이었다.

꽃봉오리 끝이 벌어졌다. 남쪽에서부터 벌어졌다. 안쪽 꽃순 싸개는 얇아져 갈색을 띤 껍질로 변했다. 예술가들이 흔히 쓰는 동그란 빵모자처럼 볼품없이 꽃봉오리 끝에 얹혀 있다가, 봉오리가 활짝 열리는 날 실바람을 타고 땅위로 굴렀다. 나는 그것이 정말로 태아의 탯줄이 붙어 있던 태반(胎盤)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태반의 마른 모습을 연상시켰다. 목련나무는 태아를 태생시킨 후의 임산부같이 긴장을 푼 모습으로 조용하다. 봄바람도 불지 않는다. 포근한 날씨는 나에게도, 목련나무에게도 졸음을 불러왔다. 목련나무가 느끼는 출생 후의 만족감은 어려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내가 느끼는 만족감과 유사하리라. 솜이불을 만들기 위하여 목화(木花)를 타서 쌓아 놓은 무더기 속에 푹 잠긴 그런 느낌이리라.

날씨가 따뜻한 3월 중순, 비로소 겹겹이 싸여 있던 꽃잎이 열렸다. 꽃봉오리 끝 쪽부터 벌어지기 시작하여 겹겹이 포개져 있던 꽃잎들이 가슴을 풀어헤쳤다. 무명 저고리 옷고름을 푸는 손길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고 삼월의 바람에 살랑거렸다. 나는 사춘기 때의 호기심을 갖고 꽃가지 하나를 잡아 풀어 헤친 가슴속에서 젖꼭지라도 보이는지 호기심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본능적인 처녀의 수줍음이 있었다. 흰 치마끈 같은 꽃잎은 아직 꽃술을 꽁꽁 동여매고 있었다. 겹겹의 꽃잎은 성숙되지 않은 생식(生殖)의 군원을 노출시키려 하지 않고 있었다.

춘분이 지나자 훈풍이 여덟 겹, 아홉 겹의 무명 저고리와 속치마 끈을 풀었다. 한껏 속곳을 드러내며 사방으로 펴진 꽃잎들은, 태양이 빛나는 낮보다 희미한 달빛과 흰색 형광등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밤에 자태를 더욱 화려하게 했다. 이는 전등불이 없던 시절, 호롱불만이 간간이 문 창살을 뚫고 희미하게 나오던 고향의 초가집 지붕 위에서 고요히 피었던 박꽃들과 너무나 닮아 보였다. 그때 그믐달의 희미한 달빛 속에서 보았던 박꽃의 흰 색깔은, 내 손바닥 쪽의 손목에 얼음을 올려놓았을 때의 차가움보다도 더 차갑게 느껴졌었다. 또한 그 차가움과 음산함이 흰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목련꽃 자태에서도 그대로 묻어 나왔다. 이는 어릴 적 할머니와 어머니의 옛날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소복한 처녀 귀신을 연상시켰다. 그 처녀의 애달픈 사연을 이야기하듯 꽃잎들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차가운 흰빛을 별빛도 없는 어두운 하늘 속으로 펼쳐서 날려올렸다.

나는 목련꽃이 여덟 혹은 아홉 장의 꽃잎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대부분의 꽃들은 아홉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부의 꽃들에서만 여덟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간 풀어 헤친 꽃잎 안쪽으로는 막대형의 수술이 꼿꼿한 자세로 서 있고 밑에는 수많은 암술들이 웅크린 자세로 붙어 있다. 꽃잎들은 몸을 약간 비틀면서 거만한 듯 서 있는 수술과 수줍은 듯 웅크린 암술들을 고이 감싸 안아서 꼭꼭 감추고 있다. 아직 사춘기를 지나지 않은 모습이다.

꽃봉오리들이 쳐지기 시작한 지 이틀이 되지 않아 꽃잎이 처진 놈들이 보였다. 무명 저고리의 앞섶을 모두 풀어 헤치고 숨기고 간직하였던 생식 보존의 꽃술을 그대로 밖으로 노출시켰다. 새댁의 모습을 볼 새도 없이 사십 대 중반을 넘긴 펑퍼짐한 모습이다. 부끄러운 듯 웅크리고 있던 꽃술들도 부끄러움을 잊어버린 아줌마의 모습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다. 봄날의 따뜻한 햇볕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벗어 버린 알몸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꽃잎들이 하나 둘 처지더니 갑자기 꽃술만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살랑거리던 봄바람에 몸을 던진 것이다. 꽃이 피는가 싶었는데 지고 말았다. 꽃잎들이 꽃봉오리 안쪽 꽃순 싸개를 트고 나올 때 나는 무수히 많은 뾰족한 부리를 가진 새들이 나무에 앉아 있는 것으로 착각했었고, 꽃잎이 벌어져 만개(滿開)했을 때는 흰 조화(造花)들이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으로 생각도 했었다. 그 조화들은 오래갈 것으로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짧게 생을 마감했다. 땅바닥에 누워 있는 꽃잎들에서는 태생과 성장의 아름다움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야기로만 느껴졌다. 단지 늙어 감의 추함과 쓸쓸함만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찌 이러함이 목련의 일생에만 국한하겠는가. 인생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