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편지 / 김진식
가끔 편지를 쓰고 싶거나 받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도 누구에겐가 다하지 못한 간절한 사연이 남아 있으며, 알 수 없는 파랑새로부터 아침 까치마냥 전해 주는 기쁜 편지가 기다려지는 것은 버릴 수 없는 소망 때문일 것이다.
편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역시 편지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그리워하며 애틋한 정을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단연 압권일 것이다.
요사이 전화 한통화로 거침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만나기가 무섭게 뜨거워져 버리는 속결주의에 비한다면 편지야말로 서로의 가슴과 가슴이 만날 수 있으며, 마음과 마음이 넘나들면서 그 은근한 달아오름과 은밀한 생각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이랴.
누구나 젊은 날에 한 번씩 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한 장의 편지가 얼마나 떨리고 두려운 것인지, 얼마나 아름다운 분홍빛 채색의 설레임인 것인지, 또는 저 하늘의 빈바람과 별들의 뜨거운 기원과 같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싶다는 것은 아름다운 정감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그리움의 표현일 것이며, 받고 싶은 한 장의 편지 또한 헛되지 않은 삶의 따뜻한 위안과 차지 않은 빈 뜨락의 쓸쓸함 때문이리라.
이리하여 아직 가슴을 데울 수 있고, 그 가슴으로 설레임을 지닐 수 있으며, 기다림의 은밀함을 소중하게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산 너머의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들면서 하얀 종이 위에 그리운 빛깔을 진하게 그려서 띄워보낼 수 있다면 그 삶의 빛깔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싱싱할 것인가.
그리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그런 외진 곳에서라도 아직도 저 산 너머의 어디메쯤엔가에서 그리운 뉘가 있어 언제인가는 한 장의 편지가 내게로 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하루하루의 삶이 어찌 메마르고 무료하기만 할 것인가.
편지를 쓰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아무에게도 써 보낼 곳이 없다는 것이며, 기다린다는 것 또한 아무에게서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기대치를 믿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알 수 없는 시간을 열어가는 것이며 그 공간에 꿈 하나쯤 그리움으로 새겨 간직하는 것은 나름대로 뜻을 부여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설정이나 기대보다 더 짙게 외로운 길벗이 되어 오히려 간절함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주소를 댈 수 없는 저 하늘의 허무와 별들의 기억과 계절마다 맞이하는 채색 위에 한줄기 바람글자로 쓰고 싶은 편지, 썼다가는 지우고 지웠다가는 다시 써서 띄워보내고 싶은 편지,
끝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남아 있는 편지, 그래도 기다려야 하는 편지…. 이리하여 언제나 쓰고 싶은 한 장의 편지는 남아 있으며, 쓰고 싶은 편지가 남아 있는 한 기다리는 편지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창을 열면 어느 틈엔가 삭막한 겨울이 떠나버린 대지 위에 수선스럽도록 봄이 와서는 연초록 수풀과 꽃들이 구름처럼 산을 기어오르는 같이 보인다. 저 봄 산천의 부지런한 숨소리가 가쁘게 묻어온다. 부드러운 바람이 봄냄새를 풍기며 "앓이"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럴 때 한 장의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여름 날, 뭉게구름이 하늘과 호수로 무리지어 흐른다. 그 흐르는 몸짓 위에 마음을 적어 보내고 싶어진다. 호수 위에 흐르는 구름의 무리를 지켜보며 돌아오지 않는 순간처럼 편지를 띄어보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날, 휑하니 불어오는 바람으로 뒹구는 낙엽이나 달빛어린 푸른 골짜기에 이끌려 무엇이든 텅텅 비워버리며 돌아가는 마음으로 가을편지를 쓰면 어떻겠는가.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허무일지라도 그 속의 적료함과 을씨년스런 풍경으로 한줄기 바람에 스러지듯 편지를 띄우고 싶어지는 것이다.
겨울 날에도 얼어붙은 골짜기와 하얀 눈 위에 차라리 뜨거운 입김처럼 호호 불며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때로는 천연스러운 자연의 모습에 이끌려서도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하늘과 바다와 강과 수풀과 바람에게도, 바위와 언덕과 벌판과 갈대와 속삭이는 비에게도 무엇인가 남아 있는 그리움이거나 사랑 같은 것이 가슴에 젖어와서는 간절하고 아쉬움 같은
두려움과 설레임이 오간다. 그래서 쓰고 싶은 한 장의 편지는 언제나 남아 있으며, 받고 싶은 편지도 지워버리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쓰고 싶은 편지 이것은 언제나 벼르는 편지이며, 갈 데 없는 편지이며, 글자로서는 나타낼 수 없는 가슴의 편지이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자람이 없는 사랑의 편지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기다리는 편지는 올 수 없는 편지이며, 내 가슴으로 와서도 빛깔이나 말로서는 읽을 수 없는 그리운 편지다.
그러나 쓰고 싶은 한 장의 이 편지야말로 메마르지 않고, 서둘지 않으며, 남아 있는 따뜻한 위안인 것을 어찌하랴. 남아 있는 한 장의 편지, 그것의 그리움을 위하여 더욱 기다림은 아쉽고 외로우면서도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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