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여인들 / 최태준
약수터를 오르내리는 길에 얼굴을 가린 여인들과 이따금 마주친다. 천으로 만든 가면을 썼는데, 그들이 곁을 스쳐 지날 때면 나는 숨을 죽이고 길섶으로 물러선다. 익명성의 그 섬뜩함 탓이리라. 얼굴을 보지 못하니 그 표정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가면의 여인을 처음 본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산 입구에서 우연히 마주치고는 적이 놀랐었다. 다른 여성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참이나 눈여겨 바라보는 모습에서 그 고안품의 파급효과가 능히 예견되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가면의 얼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더니 이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요즘은 얼굴가린 남자들까지 보인다.
눈과 귀를 빼고 얼굴 전체를 가린 덮개는 얼핏 보면 중세 무사의 철가면과 닮아 있어 그로테스크하다. 이것의 핵심적인 기능과 디자인은 중간에 볼록 속은 코싸게인데 그 모양이 여간 괴상치가 않다. 주먹만 하게 솟은 코싸개의 아래 부분은 터두었는데, 숨쉬기 편하라고 그랬겠지만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바로 그 부분으로 밖에서는 바람이 들락거리고 안에서는 착용자의 숨이 내뱉어지며 기이한 생명체의 형상으로 꿈틀대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가면을 착용한 여성들은 예외 없이 머리에는 운동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다. 결국 가면과 모자가 맞붙다 시피해서 눈조차도 뵐 듯 말 듯하니, 완벽한 익명성을 보장한다. 앞뒤를 훑어봐도 전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그 얼굴 덮게는 자외선으로부터 얼굴 피부를 보호하려는 의지의 소산일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여성을 최고의 미인으로 쳤다. 아직도 미인에 대한 그 기준이 여전히 여성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인가. 그렇다 해도 숲 그늘에까지 답답한 가리개를 굳이 쓰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숲에서 부는 상큼한 바람을 한참 들이키다가 돌아보면 여인들은 여전히 저 물건을 쓰고 있다. 답답하고 좀 우스꽝스럽다. 갈수록 그 효용성이 늘어나 심지어 비오는 날이나 밤에도 쓰는 모양이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얼굴을 가리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상대방의 표정을 알지 못하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언젠가 하산하는 좁은 오솔길에서, 우람한 몸집에 과도를 손에 잡은 가면의 여인과 딱 마주친 적이 있다.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다행이 다음 순간 땅바닥에 널브러진 사과껍질을 발견했고 가면 뒤에서 우적우적 씹어대는 소리가 들려와 상황이 이해되긴 했지만, 하마터면 나는 그 여인을 복면강도로 오인할 뻔했다. 아무리 연약해 보이는 여자일지라도 얼굴을 가린 채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그만 움찔하게 된다.
나는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먼저 인사를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익명의 가면보다는 맨 얼굴에 인사하기가 훨씬 편하고 수월하다. 가면을 보고 인사할 때는 왠지 뿌뼛쭈뼛 망설이게 된다. 바위나 나무한테 말을 거는 것이 오히려 더 쉽다는 생각도 든다.
가면의 여인에게 말을 건넬 때는 대체로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어쩌면 산 아래서 그것을 뒤집어쓸 때 이미 마음의 빗장까지 질러버렸을지도 모른다. 모기소리 같은 응답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이런 획일적인 생각은 옳지 못할 것이다. 개중엔 얼굴을 가린 게 미안해서 인사 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다짐한 연약한 마음도 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요즘 가면의 얼굴에 인사하는 일을 등한시하고 있다. 응답이 없는 섭섭함도 있지만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공연히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다. 호젓한 산길에서는 좀 무료할 테지만.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앞산을 오르다가 뒤처진 아내가 기척이 없기에 돌아보았다. 아뿔싸! 아내가 예의 얼굴 덮개를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닌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놀라움에 앞서 배신감마저 들었다. 힐난을 할까 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산에서 예쁜 당신 열굴을 쳐다보며 걷는 게 좋아.”
“그래요?”
아내는 그것을 슬쩍 벗어 배낭에 집어넣었지만, 그녀가 자기 친구들과 산행할 때는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산에서의 진정한 즐거움은 나무, 개울, 바위, 새, 바람, 같은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고 오르내리는 등반객들과도 격의 없이 친구가 되는 일이다. 여성들이 각자 얼굴에 내린 커튼을 걷고, 속살대는 개울물에 땀을 씻고, 산바람을 쏘이면서 야생화의 향기에 콧구멍을 열었으면 한다. 목청껏 야호를 외치고, 장엄한 자연의 오케스트라에 귀 기울이며, 자연과의 일체감을 향유했으면 좋겠다. 산에서 이보다 더한 기쁨과 안락이 어디 있을까.
기실 가면은 가면무도회에서나 어울리는 물건이다. 저 유명한 이탈리아 베니스의 가면축제는 13세기 십자군원정 때 전사들이 무슬림 여인들의 히잡을 목격하고 돌아와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슬림 여인들의 히잡은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 이외의 다른 남성들에게 얼굴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뒤집어쓰는 물건이다. 어쩌면 그들의 히잡은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들을 섬처럼 고립시키는 잔인한 족쇄일 것이다. 아프리카 가면축제는 무병장수와 종족의 번영을 비는 주술적 의도였다. 우리의 탈춤은 진일보한 것으로, 사회 지도계층의 도덕성을 질타하려는 비판적 의도를 담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탈춤놀이를 통해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베니스 가면축제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가면을 쓰는 기간 동안만큼은 평등을 구가하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가면이 어디 이것뿐이랴. 우리는 복잡다단한 사회구조 속에서 경쟁하고 성취하고 살아남기 위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매일 매순간 많은 가면을 쓰고 산다. 그래도 안 그런 척 안 그래도 그런 척 말이다. 어느 누구도 이 족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보이지 않는 가면이 무서운 것이지 드러낸 가면이야 그저 애교스럽게 봐줄 만도 하지 싶다.
베일에 가리면 신비감을 자아내듯 가린 얼굴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산길에서 가면의 여인을 스쳐 지나며 가끔 이 분은 얼마나 미인일까를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게 얼마나 엉뚱하고 엉큼한 수작인가. 이것만으로도 나의 가면은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쯤에서 저 얼굴 없는 여인들을 무죄방면하고 나의 얘기를 줄여야만 하겠다. 또 다른 가면이 노출될는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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