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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나는 엉덩이를 좋아한다 / 임만빈

나는 엉덩이를 좋아한다 / 임만빈

 

 

 

산을 오른다. 산을 넘어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큰 병을 앓고 나서 건강을 되찾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걷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몇 발짝 앞서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산을 오르고 있다. 계단으로 된 오르막에서는 손을 잡아 이끌기도 한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좋다. 한 가정의 평화를 보는 듯해서다. 아니, 꼭 그래서만은 아니다. 원래 나는 사람의 뒷모습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예쁘게 깎아내고 덧붙인 얼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 좋게 만든 유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억지로 만든 가식의 웃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어서 좋다.

뒷모습 중에서도 엉덩이의 모습을 특히 좋아한다. 오해를 맏을 만한 말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흔히 미인의 조건으로 가는 허리를 들먹이는데 개미 같은 허리도 보름달 같은 엉덩이가 뒷받침해줘야 풍성한 미인의 모습이 완성된다. 가는 허리만 있어서는 빈약한 모습일 뿐 풍만한 미인의 모습을 그려내지를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인을 언급할 때 엉덩이가 들먹여지는 일은 드물다. 얼굴과 몸매만 강조된다. 몸매 구성에 허리와 엉덩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말이다.

남자의 엉덩이도 매혹적이긴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 여름이면 한더위를 식히기 위해서 연못에서 미역을 감곤 했었다. 그때 빨리 물에 뛰어들기 위하여 먼 곳에서부터 옷을 벗어 한 손에 들고 바람개비처럼 돌리면서 숨이 차도록 달려가면 솟아오르는 땀은 한낮의 태양빛에 반짝였고 엉덩이는 팔딱거리며 솟아올랐다. 그 자그마한 엉덩이는 얼마나 앙증스럽고 신선했던가. 하지만 학교에서 벌을 받을 때는 매를 맞는 부위이고 아파서 주사를 맞을 때에는 바늘에 찔리는 부위가 바로 엉덩이였다.

청년 시절의 엉덩이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미(美) 에만 관심을 둘 수가 없었으니 삶이 빡빡하고 미래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인고의 시간, 그 길이와 강도에 따라 미래의 삶이 결정된다고 믿었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의자에 앉아 보냈다. 확고한 몸의 받침판이 필요했다. 엉덩이가 그 역할을 했다. 진물이 생기고 못이 박혀도 엉덩이는 미련스럽게 참았다. 그래야 받들고 있는 몸이 미래에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울 것을 아는 듯이 말이다.

처녀의 엉덩이를 생각하면 귀엽고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손으로 쓰다듬으면 꽃잎처럼 보드라울 것 같지만 언감생심(焉敢生心) 치한으로 몰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앞에서 또닥또닥 걸어가는 처자(處子)의 모습을 보라 그 가는 다리 위에서 불쑥 솟아오른 두 개의 동그라미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걸음을 옮길 적마다 경쾌하다. 두 둔덕의 율동은 마치 어린 손녀가 춤추는 것처럼 깜찍해서 박자에 맞춰 따라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여성의 가장 일반적인 본질은 생산과 키워냄이라고 하면 여성들에게 몰매 맞을까. 단순히 동물적 차원으로 말하면 암컷의 아름다움은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수단이 본질을 앞설 수는 없다. 넓고 푸짐한 엉덩이가 가냘프고 앙증스런 엉덩이보다는 생산능력의 우월성을 암시한다. 어머니들은 며느리를 선택할 때 미적인 가냘픈 엉덩이보다 생산에 적합한 푸짐한 엉덩이를 찾는다. 이 때문에 결혼 당사자인 아들과 어머니가 간혹 다투기도 한다는데 아무래도 난 어머니의 선택에 동의하고 싶어진다.

아기를 낳은 엄마는 자식을 키우는 데 정성을 다하느라 자신의 엉덩이의 모양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의도해서가 아니라 본능이다. 삶의 하중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엉덩이는 더욱 넓어지고 평평해진다. 나이든 아주머니의 모양 없이 펑퍼짐한 엉덩이는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다.

목욕탕에서 노인들의 엉덩이에 까맣게 못이 박인 자리가 눈에 뛸 때가 있다. 얼핏 보면 징그럽고 보기 흉한 자국에 불과 하지만 나는 머리를 숙이곤 한다. 한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치열했던가를 보여주는 듯해서다. 그리고 한 번도 남의 위에 올라서지 못하고 평생 남을 받들며 살아온 삶의 숭고한 표증(表證)처럼 보여서이다.

동그스럼하고 보드랍던 둔덕은 이제 쭈글쭈글하고 찌그러져 볼품이 없다. 미(美)와 희생과 종족보전과 겸허함과 진실성으로 한생을 보냈던 엉덩이가 이제 삶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무겁던 체중도, 삶의 하중도 모두 훌훌 벗어 던지고 유유자적 정토의 땅으로 향한다. 자신의 모습을 닮은 묘를 조용한 산중에 만들어 놓고.

엉덩이 같은 삶을 살고 있거나, 살다 저 세상으로 떠나간 사람들이 어찌 없으랴. 한평생 남의 밑받침으로 살다가 가슴에 못이 박힌 사람들. 그들도 젊은 한때 신분상승의 꿈을 꿔보았지만 성형과 꾸밈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버려진 채로 한평생을 살고 있거나, 살다 사라진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안다. 그들의 삶이 진실한 삶이었다는 것을. 성형한 얼굴이나 젖가슴은 세월이 지나면 추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자연스런 생모습은 세월이 지나도 추하게 변하지 않고 우아함을 오래오래 유지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