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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지금 내가 그리운 것은 / 권일주

지금 내가 그리운 것은 / 권일주

 

 

 

내가 지금 가장 그리운 것은 자다가 깨어 부스스한 눈으로 하늘의 별을 보는 것입니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짐 더미 속에 나도 한 덩이 실려서 어슴푸레 깨어나 보면 까아만 하늘에서는 별들이 한없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멀리멀리 떠나가는 나를 따라 별들이 춤을 추며 오고 있었습니다. 큰 항아리를 기둥 삼아 담요를 깔고 어머니는 이삿짐 속에 내 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속에 하늘을 보고 누워서 나만을 밤새껏 쫓아오는 별들과 이야기하며 실려 갔습니다. 지금 새로 이사 가는 곳은 어떤 곳일까, 얼굴이 동그란 내 동무가 그곳에도 있을 꺼야. 이태쯤에 한번씩 전근을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짐 속에 나도 실려서 이사 가던 날 밤은 그지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이 다음에 또 만나자고 손을 흔들며 이윽고 별들이 물러간 자리에는 어느덧 뿌우연 새벽이 와 있었습니다. 

지금 또 내가 그리운 것은 미루나무가 열을 서있는 방천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주 기다란 나무이어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날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하나 둘 셋 넷 나무 그림자를 세며 한 발로 개금발을 뛰어 보고 싶습니다. 구멍이 두어 군데 뚫린 멍석을 깔고 그늘 밑에는 참외 장수가 있었습니다. 속이 버얼겋게 내비치는 개구리참외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 버얼건 색깔이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신을 벗은 맨발의 그 집 아이가 배꼽이 드러난 잠바를 입고 방아깨비랑 소금쟁이를 열심히 잡고 있었습니다. 실처럼 가느다란 손을 내저으며 여치 집 속에서는 그놈들이 빤히 나를 내어다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또 그리운 것은 저녁 어스름에 동네 앞 신작로에 나가 보는 것입니다. 어둠을 가득 싣고 온 트럭들이 머물다 떠나간 자리가 다시 보고 싶습니다. 금방 내려놓은 어둠이 제 꽁무니마저 삼켜 버리면 이 세상에는 오직 까아만 적막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색깔도 없는 비어 있는 길 한가운데 한동안 서보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나는 또 지금 예닐곱 살로 할머니 댁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보고 싶습니다. 비라도 내리면 더욱 좋습니다. 그곳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쏟아지는 비라면 더욱 좋습니다. 빗방울들이 뜨락에 구멍을 파는 것이 보고 싶습니다. 그 옆에서는 다른 빗방울들이 방아를 찧고 있기도 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장단을 맞춰가며 방아를 찧었습니다. 큰돌에 부딪쳐 외마디 소리를 내며 흩어지는 빗방울도 있었습니다. 잔모래 틈새에서 귀엣말로 소곤대는 작은 빗방울의 귀여운 얼굴도 다 시 보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 그리운 것은 안경너머에서 날카롭게 빛나던 아버지의 눈빛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무엇인가를 그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를 마음 조이게 하던 그 눈빛입니다. 앞뒤 뜰을 분주히 오가시던 어머니의 바쁜 치맛자락 소리도 또 듣고 싶습니다. 한 솥 삶아 낸 빨래를 두들기는 샘 가의 어머니 방망이 소리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또 모두가 돌아간 방과후의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어 보고 싶습니다. 청소가 끝난 말끔한 책상에 앉아 깨끗이 닦인 칠판에 내 꿈을 하나 둘 그려보고 싶습니다. 아무도 엿보지 않는 그 비밀스런 행복을 다시 맛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다가와 운동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될 때까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나는 또 텃밭에 들어가 이제 막 보라색 옷을 입기 시작하는 어린 가지를 따서 먹어도 보고 싶습니다. 그 아릿한 맛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냥 그리워할 뿐입니다. 높은 아파트의 거실에 앉아 멀리로 보이는 산을 내다보고 그저 그리워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목이 긴 나는 아무래도 행복한 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