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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형은 상행선 나는 하행선 / 이윤기

형은 상행선 나는 하행선 / 이윤기

 

 

 

조영남이 부른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 처음 듣고는 그가 지은 노래인줄 알았다. 그런 노래를 지어 부르다니, 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어서 얼마나 기뻤던지? 그런데 아니란다. 이제하 시인이 지어 부른 노래란다. 형도 이제 그런 노래 좀 지어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화개장터>단벌 신사 노릇이 지겹지도 않으세요? 우리 마음속의 찐한 노래를 좀 마중해야 할 것이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싸움이 붙는다. 조영남, 한 성질 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은 어디로 올라가는 줄 모르고 그저 꾸물꾸물 올라갈 때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고 한 올리버 크롬웰의 말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신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 오르기를 좋아한다. 나에게, 전날과 똑같은 날은 없다. 그는 다르다. 그에게 나의 진중행보는 위선이다. 삶을 밥맛없게 만드는 엄숙주의다. 그는 홀랑 까발린다. 위악적으로 보일만큼 까발린다. 그는 술잔을 받을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술잔’ 이라고 생각하면 평화가 온단다. 모호한 것도 없고 늘릴 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단다. 하지만 노래에서 예술 전반으로 확전(擴戰)되는 경우 나도 쉽사리 항복하지 않는다. 한 싸움판에서 그는 나를 윽박질렀다. 터놓고 얘기해보자. 그럼 윤기 당신이 움베르토 에코나 빅토르 위고, 세익스피어보다 더 뛰어난 문학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믿는거야? 믿으면 왜 안 되는 거냐고 내가 박박 기어오르자 그는 내 말을 ‘정신병자 같은 소리’ 라고 일축했다. 나는, ‘조영남(화가로서의)은 피카소보다 못하다’는 전제가 왜 필요하냐고 대들었다. 다 옛날 일이다. 그를 조금 더 잘 알게 되고부터, 서로 의견 마찰이 있으면 나는 이문구의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의 도입부를 인용하고는 한다.

“그러셔. 누가 말려. 형은 상행선 나는 하행선. 좋다 이거여.”

나는 문학동네 바깥사람들이 쓴 글에 관심이 많다. 명배우 김명곤(지금은 국립극장장)의 책 <꿈꾸는 퉁소쟁이>는 내 손으로 만들기까지 한 책이다. 하지만 김명곤은 외국문학을 공부하고 잡지 기자를 지낸 사람이니 문학동네 바깥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수 양희은의 책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과 조영남 형의 <놀멘놀멘> 정도는 되어야 문학동네 바깥 사람들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책에 관심을 가지는 데엔 까닭이 있다. 아무 까닭도 없이 쌍나팔 불고 나서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지요, 라는 질문을 나는 자주 받는다. 내가 글을 잘 써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 것이 아니고, 글 쓰는 일을 아주 직업으로 삼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면 초단(初段)은 되어요,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초보자의 입단(入段)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되풀이해서 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글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그가 구어체 문장을 쓴다는 점이다. 그의 책은 내용이 어려운데도 술술 읽힌다. 그의 책에 ‘빌어먹을 놈’, ‘쥐둥아리를 놀려대는가’, ‘씹어제키는 김용옥’, ‘무데뽀’ 같은 속어나 비어들이 생짜로 실리는 것은 생각나는 대로 쓰고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 때문이다. 그런 말 쓴다고 도올을 비난하는 사람들, 뭘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는 속에 비어에 묻어 있는, 쓴 이의 ‘껍찐껍찐한 느낌’ 까지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문학동네 바깥사람이었던 조영남 형의 글을 꼼꼼하게 읽는 것은 시종일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까다로운 문법가들과는 달라서 구어체로 쓰인 문장의 부적절한 표현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어체 문장에 실린 생각이지 글 자체는 아닌 것이다. 문어의 구어화(口語化), 이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풀고 있는 숙제다. 이 현상은 영어에서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학신문은 사설조차도 구어체로 쓴다. 기사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젊은 층에서도 나날이 확산되고 있다.

구어체로 시부렁거리듯이 쓰기만 하면 다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서 나는 ‘초단’ 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조영남이 쓰는 글, 때대로 배꼽 잡아가며 그냥 읽어버리는 것도 또 한 독법이겠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가 구어체 글쓰기의 총대를 메고 있는 것 같다.

구어체로 글쓰기. 이 양반, 아무래도 구어체 글쓰기의 고단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