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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내 창가의 오동나무 / 서지숙

내 창가의 오동나무 / 서지숙   

 

 

한 낮이다. 모든 것들이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로 눅진한 침묵에 잠겨있다. 흡사 고행하는 수도승의 모습 같기도 하고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도무지 움쩍도 않고 달싹거리지도 않는 한 낮의 풍경이다. 아파트 동과 동사이로 난 공간과 아파트를 빠져나오는 길들이 노릇노릇 타고있다. 물이라도 한 바가지 뿌리면 뿌지직 소리를 내며 잠시 지글거리다 바짝 마를 것 같다. 달궈진 인두처럼 길이란 길은 확확 지열을 뱉고 있는 것이다.

이 곳으로 이사 온 후, 나는 습관 하나가 생겼다. 틈틈이 5층 베란다에서 한 길을 내려다 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무엇보다 내 시야에 먼저 들어오는 것이 있다. 아파트 귀퉁이에 서 있는 한 그루 오동나무다. 엇그제 가지치기를 해서 비를 흠뻑 빨아들인 가지단면으로 다시 무성한 잎들이 어우러져 오동나무는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결에 너울너울 어깨춤을 춘다. 그 광경을 높은 곳에서 보노라면 작은 섬 하나가 바다위에서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베란다창가로 가서 오동나무를 본다. 그러면 오동나무도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러기를 여러 날 어느덧 우리는 서로에게 여타의 그 무엇이 개입 될 수 없는 사색의 시간이 되고 강렬한 이끌림으로 서로 마주하고 서 있다. 그렇게 한 참 마주 선 채 바라본다. 잎들은 오동나무의 눈빛처럼 진녹으로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잎은 움직임이 없어도 너울거리는 듯한 연상작용이 들게 한다. 그래서인지 조용히 반짝이는 눈동자같다.

가끔 답답한 마음에 오동나무 그늘을 향해 헛 숨을 고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왠지 내 자신이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동나무… 마음속으로 가만히 불러보면 내 혈관으로 오동나무 물관 속 상큼한 청수가 흐르는 듯 푸른 기운이 돌고 서릿빛 사색이 돋곤한다. 지난 봄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삭막한 베란다창으로 굳건히 서 있는 오동나무를 보고 많은 위안을 받았다.

유명을 달리하신 시어머님의 오랜 병환으로부터 어느 순간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기에 나는 너무나 지쳐있었고 비워진 마음은 극도로 허해 있었다. 지나 온 시간들이 어혈처럼 굳어 일상적인 것들과도 소통되기 힘들만큼 내 삶의 레일은 녹슬고 있었던 것이다. 전입가경으로 불혹의 나이에 들어 선 나는 참을 수 없는 극심한 공허를 느끼게 됐고 나는 무엇으로든지 채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 또한 깊어지 듯 나의 공허는 깊어만 갔다. 치유제를 못찾고 떠도는 나에게 남편은 새로운 곳으로의 정착을 권했고 급기야는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계기로 만나게 된 오동나무. 오동나무잎을 보면서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한 잎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소중하게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다시 뜨게 된 것이다.

한 잎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허공을 흔드는 것이고 그 허공은 가만히 나에게 전이되어 오는 한 잎의 언어로 우리는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나는 다문 입으로 미소를 보낸다.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는 그대가 아버지처럼, 큰오빠처럼 믿음이 가서 좋다고, 기분이 참 좋다고 그리고 내 집 그것도 가장 창이 넓은 베란다쪽에 믿음처럼 서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을 건넨다. 오동나무가 내 시야에 가득차서 잎들이 너릇너릇 잠겨오는 순간마다 내 마음도 넓어지고 무엇인가 여린 것들을 감싸 안아주고 싶도록 푸근한 마음을 갖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동나무에 연보랏빛 꽃이 피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감격했다. 거기 잠시 내 자신을 찾고자 애쓰는 나를 위해 밝힌 꽃등처럼 핀 꽃을 봄으로써 다시 생기를 얻게 된 것이다. 전혀 새롭고 낯선 곳에서 대하는 인상깊은 기억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잊혀지지 않을 또 하나의 가슴찡한 아름다운 인연의 편린들이다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너른 잎 사이사이 그 연보랏빛 꽃들은 수줍고 어여쁜 자태로 언뜻언뜻 내민 화관 쓴 처녀의 얼굴같기도 하고 원추모양의 꽃을 실눈을 뜨고 보면 창호지를 새어 나오는 불빛처럼 은은한 등불같아서 하마 초가을 사각사각 깎이며 불어대는 바람소리라도 들리는 듯 했다.

오동노인과 관노인의 전설이나 우륵이 가야금을, 왕산악이 거문고를 만들어 아름다운 음을 노래한 것이나, 결혼하는 딸에게 장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나, 나막신의 재료로, 모친상을 당했을 때 짚는 상장으로 쓰인 것이나 이러한 전설이나 다용도 쓰임도 결코 간과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우선 오동나무 그 밑둥과 깨끗하고 넓은 잎에서 후덕하고 담백한 믿음이 가는 사람을 연상하곤 한다. 때 묻지 않은 원초적 믿음으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작은 이익에 좌지우지 않는 불변성을 오동나무는 닮은 듯하다. 날마다 급변하는 세태에 가장 절실한 신뢰의 덕목이라고 본다.

오동나무가 품고있는 내실의 곧은 아름다움과 범접 할 수 없는 청정 맑은 나이테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내 자신이 아름답고 순수하면, 그런 정신적인 소유자라면 그 주위가 환하고 아름답게 빛나지 않겠는가. 요즘같이 뜨거운 한 낮, 오동나무 그 풍성한 그늘처럼 우리들 마음에도 서늘한 그늘 한 켠쯤 내어 줄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 인생이겠는가.

삶이 다하는 그 날, 내 연륜의 단면도 오동나무처럼 곧고 너그러우며 담백한 나이테로 그려졌으면 한다. 여름이면 풍성한 그늘을 드리워 시원함을 베풀 줄 아는 너그러움과 가을이면 맑은 사람들의 가슴으로 울리는 한 편의 시처럼 삶의 여유를 베풀고 겨울이면 비록 잎들은 사위고 없을 지라라도 튼실한 밑둥처럼 늘 신뢰 할 수 있는 믿음을 주는 삶이였으면 한다.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감성적인 섬세한 서정과 여린 설레임은 가끔 그 흔들림을 허 할 수 있다지만 타고 난 인간성의 본질은 오동나무 밑둥처럼 결코 흔들림이 없기를 바란다. 그 어떤 세파의 기류에도 움쩍않는 믿음같은 것 말이다.

다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오동나무는 내 창가로 더 가까이 다가 올 것이다. 섬섬히 숨을 고른 가을바람에 해사한 낯빛으로 우수수 내 마음의 서정을 쓸어 줄 것이고 절기에 익숙해지면 해질수록 한 때 풍성한 그늘을 선물했던 잎들은 소 눈물방울처럼 뚝뚝 그 너른 잎들을 떨어뜨리고 계절의 사윔에 동행 할 것이다. 그렇지만 든든한 밑둥과 곧은 가지들은 차가운 바람과 눈발에도 더욱 푸르고 담백한 물관을 안으로 안으로 감싸안고 내 창가에서 정신적인 지주로 설인처럼 빛나면서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