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떠남의 사이 / 김진태
경부선 우등차는 바쁜 숨을 몰아쉬며 앞으로만 달린다. 차창에 기대고 있으면 낯선 들과 산 마을이 나를 즐겁게 하여 주려는 듯 뒤바뀌며 나타났다가는 물러서 간다.
기나긴 어느 시점을 더듬게 한다. 그리운 과거를 새롭게 되살리기도 한다.
문득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이 있으면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도 잠기게 한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게 하는 나그네 길은 그런 뜻에서 한동안은 즐거울 수가 있다.
누군가 여행은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떠나는 것이라 하였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 마음 속으로 그려보기만 하던 거리와의 만남, 생각지도 못했던 경이와 신기와의 만나는 가슴 두근거림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런 저런 만남을 기대해 볼 나이도 아니다. 여행이 반드시 이상향에의 길이 아닌 것은 기차가 두 철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확실한 것이다.
어쩌면 만남의 즐거움보다 떠나는 즐거움이 더한 탓에 우선은 여행이 즐거운지도 모른다.
이제까지의 나로부터의 떠남, 늘 쳇바퀴 돌 듯 맴돌고만 있던 둘러리를 벗어나는 홀가분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굵고 가는 올가미에서 한 시나마 떠나서,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영원히 떠나지는 못할지언정 잠시나마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값진 것인가?
한때나마 모든 불편과 번거로움에서 풀려나는 길이 열리는 것이 여행이기도 하다. 차창 밖의 풍경도 피로를 느끼게 한다. 새로운 풍경들인 것은 틀림없으면서도 사실은 조금도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연이어 산이며 들이며 마을이며 때로는 굽이쳐 흐르는 강물까지 곁들여 새로운 풍경을 구성하고 있지만, 어느덧 나의 시선은 같은 풍경화를 대하듯 새로운 것을 느낄 수가 없다.
눈을 감는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가 망막에 아로새겨진다.
얼마 전에 본 결혼식의 모습이 떠오른다. 훤칠한 키에 준수하다는 말이 어울릴 신랑의 모습과, 그 옆에 차악 달라붙은 귀염성스런 신부, 가슴에 안은 꽃다발은 행복의 다발이었다.
주례가 신랑 신부에게 다짐을 받을 때의 ‘예’ 라는 목소리가 너무나 커서 장내에 웃음의 너울이 일게 한 것도 조금은 허물이 될 수 없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서 아들 딸 둘만 낳아 국책에 순응하라는 주례의 말에, 식장을 술렁이게 하던 웃음도 인상적이었다. 식장에 참석했던 하례객들도 누구나 신혼부부의 앞날을 축복하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틀림없이 좋은 가정을 이루어서 많은 축복에 보답하겠지?”
그러면서도 방정맞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생각을 안하려 하면 할수록 또 한 쌍의 모습이 끈질기게 따라온다.
8 년 전의 일이긴 하다. 최고 학부를 나왔으며 양가 어느 쪽이나 명망이 높던 집안의 결혼식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축하객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주례도 일부러 지방 인사가 아니고 서울의 명사를 초청한 호화판 결혼식이었다.
신랑과 신부의 맹세도 또렷한 대답으로 서로 아끼고 사랑으로 받들고 순종하여, 좋은 가정, 행복한 가정을 이룩하겠다는 결의를 식장을 메운 일가친척 친지들에게 굳게 하였다.
일가친척이나 친지들은 그들의 자신 넘친 다짐을 의심없이 믿고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삼 년이 안 되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하였고, 8 년을 맞는 해에는 이혼 소송,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 근분 원인은 당자 아니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냥 구경만 하고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접어 둘 수만 없는 일이다.
양가 어느 쪽도 오래 사귀어 온 가까운 사이며 어려운 일 즐거운 일을 함께 하던 사이의 내 일과 다름없는 집안들이다. 중재의 수고도 한다고는 해 본 셈이다. 그러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다시 눈을 떴다. 고개를 흔들어 따라오는 뒤숭숭한 집념을 떨쳐버렸다.
차창 밖에는 눈발이 드문드문 춤을 추고 있다. 시야에 드는 풍경은 눈발에 어리어 한결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자연은 아름답고 건전하다.’ 눈발은 점점 어지러움을 더한다.
인간사의 모습을 화선지에 옮기고 있는 듯하다. 기차는 어지럽게 휘감기려는 눈발을 뿌리치거나 하려는 듯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 내닫고만 있다.
여행이란 새로운 만남도 아니다. 그렇다고 떠남도 아니다.
만남이 바로 떠남이고, 떠남이 바로 만남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렇다. 기차는 긍정의 대답을 되풀이하면서 눈발이 제법 난무하는 속을 뚫고 대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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