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자작나무 숲을 지나 / 손숙희

자작나무 숲을 지나 / 손숙희

 

 

버스를 타고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향하여 가고 있다. 육로를 이용하여 가는 길은 7~8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장시간의 버스 여행이라 처음에는 걱정스러웠으나 그건 잠시의 기우였을 뿐, 차창으로 펼쳐지는 바깥의 풍경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울창한 삼림과 자작나무 숲을 움직이는 바람, 태양, 구름, 호수의 조화가 동화나 소설의 배경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아름답게 각인되어 평생 잊혀지지 않는 불후의 명작들을 마음 안에서 다시 그려 보는 시간이었기에,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대상이 순간에 사라지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러시아 땅!

전 세계의 지배를 꿈꾸며 유라시아 대륙을 짓밟던 칸의 야망이 서렸던 곳, 광활한 땅을 흠모하던 나폴레옹의 욕망이 화염 속에 사라지고 말았던 러시아 땅. 서방 제국의 황제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꿈꾸게 했던 나라, 러시아를 만난다.

톨스토이와 푸쉬긴이 문학의 영혼으로 영원히 살아 있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호수 위에서 흐르는 곳, 피터대제의 광대한 꿈이 조각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네바강이 여행자를 유혹한다는 나라에 발을 들여놓는다.

『의사 지바고』가 탄생하고 『전쟁과 평화』의 무대가 되었으며,『죄와 벌』,『이반 테니소비치의 하루』,『바보 이반』,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찼던 문학 작품들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의자 지바고』의 스크린 속에서 눈 쌓인 시베리아 벌판을 끝없이 달려가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줄을 지어 있던 자작나무 숲을 향해 지금 가고 있다. 오랜 시간을 곰삭혀 왔던 러시아 여행이다.

길고도 넓은 핀란드 숲을 지나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도착하였다. 국경 수비대의 검문은 까다로웠다. 먼저 도착한 몇 대의 차량이 대기 하고 있어서 기다리는 차량의 여행자들은 도로변의 풀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끼리끼리 앉아 이야기를 나누도 있다. 기다리는 시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앉아 있을 건물도 없다.

끝없이 넓은 풀밭과 멀리 보이는 숲들의 행진, 모처럼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을 배경으로 북구의 여행자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선글라스를 끼고 풀밭에 누워버린다. 지나온 길에도 공원이나 잔디밭에 누워서 비키니 선텐을 하는 남녀의 그림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파라솔을 쓰면 이곳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다시 쳐다본다. 한 아이가 양산을 쓴 우리 일행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소리친다.

“비가 오지 않아요!”

문화의 차이는 기후에서 연유되는 것도 많다는 예가 될 성싶다. 모자를 쓰고 잔디 위에 앉아 두어 시간은 기다렸더니 우리 일행의 검문 차례가 되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시골역 대합실 풍경을 재현하며 아무 말 없이 모두들 앞 사람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차례가 되어 수비대원 앞으로 나갔더니 여권과 얼굴을 멸 차례 번갈아 쳐다보고는 냉랭한 눈초리로 나가라고 한다. 버스에 실은 짐들도 모두 검열 후 ‘이상 없다’는 사인이 난 후에 국경을 통과했다.

페레스토로이카의 여파로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 경제를 향한 개혁 운동이 사회 곳곳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어도 국경수비대의 보안태세만큼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듯, 북유럽의 노르웨이와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의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 절차에 비하면 아직도 폐쇄된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철통 같은 검문이다.

헬싱키에서 페리를 타고 에스코니아에 입국했을 때에도 제복을 입은 관원의 검문은 이렇듯 까다로웠다. 지금은 독립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를 펴고 있지만, 구 소련 지배 시절의 잔재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보안상의 이유 이외에도 치안의 편의를 위한 행정학습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긴 어렵게나마 열려진 곳, 지구상에 유일하게 통과하지 못하는 관문이 우리 곁에 있음을 잊을 수 있을까. 반세기를 가로막고 있는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이야말로 지구상에서 열지 못하는 유일한 국경선이 아닌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특별한 인사 외에는 잘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곳, 이산가족의 한을 안고 세월을 외면한 채 굳게 버티는 이념의 장벽이 무너질 날은 언제가 될지 철의 장막이라고 하던 러시아 국경선을 통과하니 휴전선이 새삼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다.

국경을 지나자 광활한 땅과 숲, 길고 긴 도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도로변의 자작나무와 삼나무, 소나무 숲은 길을 따라 무한대의 청록이다. 태곳적 숲이 자라고 청정 하늘이 존재하는 이 광활한 땅이야말로 무한대의 자원이며 가능성이 아닌가.

버스가 도착할 곳은 피터대제가 모스크바를 두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궁전을 짓고 천도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이다. 황제 피터의 숨결을 느낄 것만 같은 설렘은 그의 이름(피터, 표뜨르, 페테르, 베드로)이 도시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까닭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