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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절대온도 / 손숙희

절대온도 / 손숙희

 

 

 

 

영하의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병원에 들어서니 참 따뜻하다. 벽걸이 온도계를 쳐다보니 실내온도가 23⁰30′C.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나른해지는 몸을 견디며 신문을 읽다가 환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신문지 구겨지는 소리가 민망해서 주위를 둘러본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를 에어컨 27⁰C에 맞춰 놓고 시원해서 일하기 좋은 온도라고 하는데, 지금 23⁰C에서 따뜻하다고 느낀다.

27⁰C에서 시원하게 느끼는 여름, 23⁰C에서 따스하게 느끼는 겨울을 생각하니 이 감각의 오류덩이가 우리 몸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피부감각은 절대적 체감 능력이 없다.

눈의 감각도 역시 그렇다. 사람들은 강열한 태양빛 속에서도 태연하게 길을 걷고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지만, 대낮에 영화관에서 나오면 태양빛이 부셔서 눈을 뜨지 못한다. 학창시절, 단체 문화교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왔을 때의 그 강열한 태양빛이 기억난다. 시신경 역시 빛의 강도에 대한 절대값을 갖지 못한다.

몸이 아플 때 비로소 건강했을 때의 행복을 깨달으며, 불행이 닥쳐야 비로소 지난날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되는 것은 감성적 판단의 오류가 아닌가. 감각이나 지각 판단력, 감성마저도 이렇게 불완전하니 우리 인간의 신체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감각과 지각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 역시 그 정확성이란 것이 상대적인 수치일 뿐이다.

개인의 만족이나 행복을 느끼는 척도라고 고산 스님은 인간의 8苦에 ‘비교부족고’를 보태어 9苦를 설법한다. 상대적 빈곤에서 겪는 심리적 고통이다. 그것 역시 인간의 이성이나 행복 체감 능력이 얼마나 아둔한가를 깨우치는 논리가 아닌가. 의식주의 불편이 없어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친구가 투자한 몫이 나보다 더 놓은 이윤을 얻고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평상심을 잃고 심기가 불편해진다. 10억을 소유해도 100억을 소유한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가난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성정이다.

요즈음은 가정마다 자녀 사교육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다. 월 몇 만 원에서부터 수백 만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성적이 비슷해도 몇 년간 고액의 사교육에 힘입으면 학력의 격차가 나게 되고 대학 진학에도 격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마지막까지 성공과 좌절을 그와 같이 겪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우선 부모의 책임 한계에 있을 때까지 부모는 자녀의 앞날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자를 하는 것이 현실 사회의 병적 풍조가 아닌가. 그래서 비교부족고는 어느 고통보다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가난과 청빈과 노동을 삶의 명제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간간이 그들이 발간하는 책을 통해서 스스로 끝까지 낮아지려는 삶을 들여다본다. 낮아짐으로 행복한 이들, 가난함으로 마음이 부유한 이들, 병든 이웃의 삶 속에 들어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축복된 아름다움인가를 깨달을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행복을 매순간 체감하는 길이라고 한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참 가치를 찾기 위해 매순간 기도하면서 정해진 계율을 실천하는 길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라고도 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기독교적 설법은 인간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고 진리로서의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닐까. 고행을 입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수도자의 삶이 그런 연유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새해 벽두에 세계적인 거부들이 자살 소식이 지구촌 곳곳에 퍼져나갔다. 독일의 억만장자 아돌프 메르클레와 미국의 거부 스티븐 굿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세계 경제의 흐름이 그들의 부를 절망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다가올 경영난과 쌓아올린 이미지의 손상, 성공 뒤의 실패에 대한 좌절이 끝내 죽음의 길을 택하게 하였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간간이 그런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고산 스님의 ‘비교부족고’는 상대적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순덩어리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설법이다. 몸도 마음도 이렇게 아둔한 우리 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 누가 발했던가. 내 몸이 느끼는 절대온도의 감지 능력도 불완전하고, 행복과 불행의 절대값을 알지 못하는 아둔한 우리 인간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생각하는 힘의 위대함과 갈대처럼 연약한 의지의 양면성이 공존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신을 향한 끝없는 구도의 길, 그 필연성을 설득하는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