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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숭산스님과 현각 / 정규복

숭산스님과 현각 / 정규복  

 

 

 

 

숭산스님은 우리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세계 불교계에서 큰스님으로 꼽히고 있는 소위 4대 스님 달라이라마, 릭낫한, 마하거사난다 등 중 한 분이고, 현각은 미주의 명문대학 예일과 하버드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다가 숭산스님의 큰 영향으로 그의 꿈이던 신부가 될 것을 단념하고 지금은 한국 화계사에서 머리를 깎고 수도에 몰두하고 있는 숭산스님의 제자이다. 아울러 덧붙일 것은 그가 숭산스님에게 귀의한 이래, 그의 전생이 ‘한국의 독립군’이라고 할 만큼 한국의 음식과 풍속 내지는 예술에 심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숭산스님과 현각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현각의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불교가 만나는 것을 통해 종교 사상적으로 기독교에서 불교로 전이되는 근본 이유는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나는 이 물음을 풀기 위해 최근에 출간된 현각의 『만행』과 숭산스님의 『부처님께 재를 털면』을 읽고,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숭산스님과 현각의 상관성을 풀고자 한다.

현각은 미국의 가정에서도 동양인의 전통적 가정에 못지않은 훌륭한 부모와 여러 형제들 사이에서 곱게 자라난 엘리트이며, 게다가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신부가 되겠다는 일념 아래 좋은 환경에 어울려 오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도정신 밑에 정진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이다. 즉, 그가 신부가 되겠다는 평생 원을 건 기독교에서 풀리지 않아 제시된 문제는 왜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소유자로서 이 세상에 사탄과 영벌을 받아야만 하는 지옥을 만들어 놓았느냐는 것과 또 순진무구한 어린 나이의 사촌동생이 왜 그의 뜻에 거슬려 교통사고로 죽어야만 하느냐의 두 가지 물음이다. 그렇지만 그 해답이 기독교에서는 찾아지지 않다가 숭산스님의 말씀으로 그 물음이 풀려 드디어 스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된 사탄과 지옥의 문제는 나도 일찍부터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왔던 물음으로서 이성을 지닌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풀어야 할 의문이다. 즉 무한한 사랑과 지옥과는 신앙의 논리로서도 정면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숭산스님의 존재는 불교계에 밝지 않은 나로서도 현각의 『만행』을 통해 비로소 알았고, 『만행』을 통하여 보면 무상(미국인, 문학·철학·언어학 전공), 대봉(미국인, 유태교), 청안(헝가리인, 연극학), 무심(미국인, 유태교), 현문(폴란드인, 가톨릭), 명공(러시아인, 생물학 박사) 등 근 10명의 서양 엘리트들이 숭산스님의 선도에 심취, 한국에 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것으로 보아 숭산스님의 존재는 국제적으로 큰스님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현각의 심취된 논리가 밝혀져 있지 않아 숭산스님의 어떤 선심의 문화가 전연 다른 서양의 젊은 엘리트들로 하여금 그들의 본래 기독교 또는 유태교에서 불교로 개종되게 하였는지 매우 궁금하다는 것이다.

현각의 『만행』과 숭산스님의 『부처님께 재를 털면』에 드러난 숭산스님의 선심은 거의가 선 문답으로 돼 있어 나는 그 자료만으로는 현각 등 외국인이 받은 숭산스님의 선심을 읽어낼 수가 없고, 다만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라’가 우리 속인의 망상을 깨는 방편으로서 그들을 개종케 한 것 같다. 그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라’는 동양적인 또는 한국의 고승 효봉스님의 평생 화두인 무(無)와 일치시키면 어떨까 생각되는데, 하지만 완전한 무는 결국 생불이 아닌 이상, 죽음 이후의 세계가 바로 그것에 해당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혹시 이것이 전언한 바와 같이 이성과 과학에 얽매인 서양의 젊은 엘리트들로 하여금 숭산스님에게 지옥과 천당, 사탄과 신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과는 달리, 동양의 이들을 하나로 포용하는 일원론이 아닌지 또한 궁금하다.

나는 현각의 『만행』을 통해 현각의 종교적 신앙과 나아가서는 신앙과 윤리에 대하여 내가 경험한 신앙과 지식을 뭉뚱그려 여러 모로 생각해 본다.

첫째, 종교는 결국 인간이 부족(不足)이 전제된 상대적인 지식의 동물로서 그 옛날 원시시대부터 계속 신앙(종교)을 지니고 살아왔던 필수물이지만, 그 예속된 각자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자꾸 변하고 적응돼 나아가는 문화 현상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가 될 때 한국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문자주의적 신앙은 선진국의 신앙에 비하면 1세기 가량 뒤떨어져 있는 것 같다.

둘째, 절대자에 대한 신앙은 문화가 극에 달한 현재의 우주과학시대에도 과학에 떠밀려 치올라가기 때문에 신앙의 규모에 따라 양상이 달라지므로 문제는 처한 환경에 따라 인간에게 어떻게 봉사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윤리는 동전의 표리와 같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꼭 붙어다녀야 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셋째, 현각은 외형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된 것 같지만, 그가 밝힌 바대로 현각은 예수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도정신에 따라 불교로 전이됐기 때문에 내면적으로는 개종이 아니라 기독교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시대의 종교는 현각의 기독교가 불교로 연장된 것같이 종교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채워주는 상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나의 종교관은 기독교든 불교든 신성(영성)과 도덕을 아울러 지닌, 같은 종교의 하나로서 서로 문화적 바탕이 다를 뿐, 모두가 각자 처한 인간적 도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하나의 종교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가 속해 있는 학문 문화를 영위하는 가운데 내가 또한 속한 바 종교에 입각하여 사랑과 공의, 겸손과 봉사와 희생을 그리며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우주적 질서를 주관하는 하나님[天道]께 충성을 다하는 생활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