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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다시 찾은 일기 / 조재은

다시 찾은 일기 / 조재은

 

 

 

 

짐 정리를 도와준다고 아이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은 재미있었다. 친구에게서 받은 자잘한 선물과 카드, 영화 스크랩,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사진을 보며 옛날의 나를 보는 듯했다. 이것저것 보는 재미에 정리는 뒷전으로 미루고 제일 아래 서랍까지 열어 보았다. 자주색 표지의 낯익은 노트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노트의 첫 장을 연 순간 이런, 내 일기장이었다. 왜 여기 있을까.

첫 장만 보고 나도 모르게 다시 공책을 덮었다. 일기장을 꺼내고 싶었지만 서랍 문을 닫았다. 내 일기장인데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 본 것 같이 가슴이 뛰었다. 왜 딸이 나도 잊고 있던 일기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책상 서랍에 고이 간직한 것에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이라 준비에 바빠 이류를 묻는 것은 미루었다. 다음 날 일기는 다시 딸의 짐 속에 넣어졌다.

‘일기 사건’을 알고 1년 후, 방학에 집에 온 딸에게 어떻게 해서 일기장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창고에 겨울 옷 찾으려다 못 보던 상자를 열었는데, 엄마 옛날에 입던 옷 속에 웬 노트가 있어서 꺼내보니 엄마 일기였어요. 그냥 보관하며 읽고 싶었어요.”

아이는 중학교 때부터 20대까지 몇 차례씩 읽어보던 내 일기의 내용을 거의 외우고 있었다. 그 일기를 쓴 시기는 지금의 딸과 비슷한 나이였다.

딸이 들려준 나의 일기 내용이다.

… 내가 꿈꾸었던 결혼 생활이 이런 것이었나. 

남편은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들어와 식사 후,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새벽에 들어온다. 하루 종일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 남편이 타인 같다. 끝없이 혼자다.

요즈음 아기에게도 엄마로서 먹이고, 입혀주는 기본적인 양육만 한다. 그런 엄마에게 아기가 나를 일깨워주는 뜻밖의 말을 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떠난 선배가 물려 준 고물 전축으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었더니, 아기가 갑자기 “엄마, 나 음악 속으로 들어갈래요” 하여 머리를 전축 속으로 넣는다. 그 귀여운 모습과 말이, 멀어졌던 음악과 문학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하여 가슴이 싸했다. “전축이 작아서 우리는 못 들어가. 그래서 엄마도 엄마 옛날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아기는 음악이 아름다워 음악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나는 결혼 전 자유롭고 경제적 여유가 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나 지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표현을 아기에게는 사진이란 단순한 작은 사물로 설명하고 말았다 ….

내 일기를 말로 들으며 참 난감했다. 건강한 정신세계를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딸이 원초적인 인간의 외로움을 토로한 것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내 의문을 아는 듯, 딸은 엄마로서가 아닌 여자로서 일기에 쓰인 이야기에 통감한다고 말했다. 그 시절 엄마 사진을 보면 밝게 웃은 게 없었고, 사람들이 아름다운 도시에 살아서 좋겠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않던 엄마가 기억난다고 했다. 일기에 쓴 ‘목가와 숙녀’를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그때부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당황하면서도 딸이 성큼 내게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딸도 혼자 외국생활을 했고,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힘들어 그 아이는 내가 썼던 일기의 몇 배쯤은 쓰고 온 듯했다. 우리는 완전히 친구가 되어 속내를 떨어놓았다.

언젠가 내가 딸에게 이야기 했던 ‘인간에게 기대는 하지마다. 그러나 희망은 버리지 마라’는 말로 딸은 사람에게 헛된 기대를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나는 딸이 메일에 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라고 썼을 때 ‘네가 예술의 근처에는 갔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그날 긴 시간을 홀로 걸은 예기를 나누었다.

요즘에는 영화에 대해 묻고 문화를 배운다. 딸의 모습에서 내 젊은 날의 고뇌를 본다. 세대를 넘어 순환되고 있는 인간실존의 괴로움과 예술에 대한 번민은 대답 없는 물음만의 연속이다. 예술과 함께 하는 한,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순환의 고리다.

중학교 때부터 내 속 마음을 알아버린 딸에게 위엄 있는 엄마인척 해봐야 소용없겠지만, “왜 엄마 일기를 가져갔느냐”고 야단을 치겠다고 폼을 잡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피하고 싶은 것을 눈치 첸 딸이 깔깔 웃으며 놀렸다.

“엄마, 비도 오는데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

조금 창피해 하며 “그래” 하며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