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랙박스 / 남영숙
그녀가 문 담배에서 뿜어지는 연기가 푸르스름하게 희뿌옛다. 그의 생과 닮았다. 그의 인생은 늘 그렇게 파리했다. 젊었을 때의 고운 얼굴이 여적 남아있는 그의 흡연모습은 참 멋있었다. 나이 들어서까지 몸에 해로운 끽연을 아랑곳하지 않고, 실용과는 거리를 둔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여행길에서 이십여 년 전 남미로 이민을 떠났던 지인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것이다.
그가 자신의 미국행을 ‘흘러들어’ 왔다고 한 것은 두 아이를 데리고 남미에서 밀입국한 까닭이다. 오래 전 가족과 함께 남미로 향했던 그가 그곳에서 남편과 결별하고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물처럼 스며든 것이다. 삶은 모질지만 경이로웠다. 이혼한 여인이 먼 이역 땅에서 불법체류자로 두 아이를 키워내고 황혼녘까지 살고 있으니.
요즈음 무척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갈기를 세우고 격렬하고 다가오는 수구초심을 견딜 수가 없다. 그가 귀향하러 그곳을 떠난다면 불안정한 터전이긴 하나 그래도 생의 근저가 있는 미국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으니 고향을 그리워만 할 뿐이다. 무국적자인 까닭이다. 청산과 햇살아래 반짝이며 흐르던 강물, 뉘엿한 해가 만드는 붉은 노을이 눈에 선연하다. 끈적거리며 들러붙는 그리움에서 언제쯤이면 놓여날 수 있을까.
언론인을 아버지로 두었지만 부모는 늘 불화하였고 그런 터수에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득히 멀리서만 맴도는 행복을 잡아채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를 썼다. 미모에 명문대를 나온 규수가 되어 희멀끔한 청년의 열렬한 구애로 결혼하였다. 세상의 저의란 그런 것이었다. 세상일이란 새옹의 말(馬)처럼 행과 불행이 서로의 단초가 되어 맞물리는 것이어서 그리 슬퍼하거나 기뻐할 것이 없느니. 넌출로 오는가 싶던 기쁨은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무능한 부잣집 아들은 쓸모가 많지 않다는, 그리 새롭지 않은 사실을 통절히 느끼게 하였다. 야무진 그가 시부모를 설득하여 축나기 시작하는 가산을 정리하여 신천지를 찾아 온 가족이 이민 길에 오른 것이 이십 년이 넘었다.
내려치는 하투짝에 맞붙어 일어나는 화투패의 무작위처럼 운명의 얼레에서 풀려 나오는 자신의 삶의 얼굴이 늘 낯설었고 삶이 튀기는 파편은 아팠다. 그는 그것에 저항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그것이 외부의 고온을 이겨내는 내화벽돌로 굳어졌던 것이다. 불법체류인 채 그리 긴 시간을 살 수 있었던 미국이란 나라가 허점이 낳은 건지, 포용력이 큰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그에겐 희망을 적립할 수 있엇던 땅이다.
내밀한 연유야 알 길이 없으나 이민으로 정착한 나라에서 이혼하고 빈 손으로 국경을 넘어야 했던 그 정황이 처연했다. 제 삼의 나라에서 아이들을 가진 여인이 어떻게 비밀스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불어를 전공한 그가 남미대륙에서 배운 말이 스페인어였고 그 언어가 필요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밑절미가 되었다. 이식된 나무는 어렵사리 활착하여 투명인간으로 미국사람이 되었고 잘 자라 결혼한 두 아들은 그의 버팀목이다.
항공기의 비행기록장치인 블랙박스가 생(生)에도 있다면 낱낱이 기록된 그의 삶의 기록상자는 극적인 일로 가득할 것이다. 그의 좌충우돌하는 도전의식 때문이다. 그의 삶은 누구의 동의를 받은 적이 없다. 그저 선택하여 ‘고’를 외치고 잘못된 선택이면 응분의 수긍을 한다. 더듬이로 전진하는 그의 야성이 놀랍다. 혹자는 한낱 외국에서 불법체류나 하는 사람에게 도전정신 운운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독버섯은 식탁 위의 논리이지 자연의 논리로는 빛깔 고운 아름다운 버섯일 뿐이다. 불법 체류는 미국 내에서의 잣대이지 불가의 ‘중생’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한다면 억척스레 살아 온 한 인간일 뿐.
연전에 출간된 유명작가의 ‘인생사용설명서’는 모든 공산품에 사용법이 있듯 사람도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팁이다. 삶을 경영하는데 있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을까. 설명서의 키워드도 감사와 긍정, 용기와 희망, 기쁘고 즐겁게, 등으로 그야말로 삶의 정석일 뿐이었으나 작가의 재치와 성실함으로 책은 알곡으로 가득하였다. 친구가 그 책을 읽은 듯 살지 않았는가 한다.
그가 세간의 성공과는 거리가 있다 하나 실패한 인생은 결코 아니다. 그의 생에 옹이를 박고 관통해 간 그 많은 상처들은 이제 얻은 흉터로만 남아 있다. 한 여인의 인생유전은 이제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맞고 있다. 그의 블랙박스에 귀향이 기록될 것인가. 여느 귀향과는 다르다. 제나라지만 끈끈한 연고도 재물도 기다리지 않는 또 하나의 개척이다. 고난도의 비행 기술이 필요한 저공비행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수구초심만으로 돌아오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의 결정을 지켜볼 것이다. 그의 촉수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크게 성공한 인생만이 타인의 귀감이 되지는 않는다. 그의 강인함이 빈 수레처럼 투덜거리며 살았던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리석게도 비단길로 가려고만 하지 않았는가. 후일 열려질 삶의 기록 상자를 위하여 신들메를 고쳐 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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