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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미안하지 않다 / 홍억선

미안하지 않다 / 홍억선

 

 

“집 떠난 자식들 홀로남은 아내외롭다던 그녀의 홍조 묻은 낯빛 일찍 귀가한 날 어색한 웃음만”

 

집 안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자 주변이 부스스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에 간 것일까?’ 둘만이 사는 집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거실은 한층 넓게 느껴진다. 바닥에 깔아놓은 담요가 얌전하게 접힌 채 한쪽에 밀쳐 있는 것으로 보아 잠깐 밖에 나간 흔적은 아니다. 조금 일찍 들어갈 것이라고 문자라도 미리 넣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올해는 어쩌다 밤낮으로 바쁜 사람이 되었다. 연초에 새 달력을 넘기면서 짚어보니 명절이나 조상 기일을 빼놓고는 빈 날이 거의 없었다. 일자리 하나가 귀한 시대에 즐거운 비명이라고 부러워할는지 모르겠으나 알고 보면 영양가 없는 일정이다. 낮에는 먹고 살기 위해 쫓아다닌다 쳐도, 밤에는 내 신명이 뻗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별 볼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늦은 귀가 시간이다. 밤에 하는 일이 몇 시간씩 미리 짜놓은 강의인지라 애초에 일찍 집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일주일에 두어 번씩 타시도에 가는 날은 열한 시를 훌쩍 넘기게 된다.  

 

이런 나를 염려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내다. 처음에는 건강이 걱정되니 제발 밤일을 그만 두라고 사정을 했다. 지난해 새로 구입한 승용차가 일 년 만에 삼만 킬로를 달렸으니 그런 염려도 무리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그놈의 수필인가 뭔가 때문에 나들이는커녕 오붓하게 밥 한 숟가락을 먹어본 지가 옛적이 되었다고 타박을 해댔다. 나중에는 문학판에 여자들이 많다고 하던데 후줄근한 여편네 꼴이 우습게 보이느냐고 강짜까지 보탰다. 그러더니 근자에 와서는 무심모드로 돌아선 눈치였다.

 

그런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자식들이 떠나간 집에서 나 하나를 기다리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유일한 낙인 헬스장에 가서 반나절을 뛰고, 또 월드컵 경기장을 열 바퀴나 돌아도 초저녁이라는 말에 눈시울이 젖도록 미안했다. 문학만 안 하면 우리는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에 머리를 주억거리며 ‘그래, 밤일을 그만두리라’ 여러 번 다짐을 했다.

 

그렇게 미안한 아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텔레비전에서는 가요무대가 한창이다. ‘전화를 해볼까’하는 순간 휴대폰이 부르르 떨면서 짧은 문자 한 통이 날아든다. “어디세요?” 멀리 수업 가는 날인 걸 알고서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느냐는 아내의 다정한 문자다.

 

사실 오늘은 저쪽 사정에 의해 갑자기 휴강이 되는 바람에 느릿느릿 퇴근하여 여유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나는 오히려 아내가 궁금해서 “어디?” 하고 같은 문자를 보낸다. 금방 답이 온다. “집” 집이란다. 이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인가. 지금 내가 거실에 누워 저를 기다리는데 저가 집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한다.

 

의심이 폭풍처럼 머릿속을 감돈다. 오호라, 일정을 꿰뚫고 앉아서 ‘오늘은 언제와?’ 하고 문자를 날릴 때마다 내심은 다른 데 있었단 말이지. 홀로 집을 지키며 이제나저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이었던 것일까.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너그럽게 이해를 해본다. 아니지, 문을 열어주던 아내의 낯빛에 가끔 홍조가 있었고, 안주로 그만인 꼬리한 곱창냄새도 슬쩍 풍겼던 것 같다.

 

새로 나온 가요도 열심히 흥얼거리던 모습도 떠오른다. 요즘 세상에 남편만 기다리며 집에 박혀 있는 중년의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주변의 말에도 일리가 실린다. 어쩌면 나보다 더 바쁘게 돌아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자 마음이 묘하다. 슬슬 초조한 마음이 생긴다.

 

열한 시가 되자 딸그락거리며 문을 따고 아내가 들어선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내가 귀가할 시간의 십 분 전이다. 나를 본 아내의 눈이 잠깐 흔들리더니 이내 평정을 찾는다. “웬일로 일찍 왔네.” 웃음으로 버무리는 아내의 낯빛에 역시나 홍조가 묻어 있다. 스쳐가는 옷자락에서 코에 익은 곱창냄새가 풍긴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그렇게 됐다며 덩달아 큰 웃음을 날린다. 그 웃음이 어색하다. 문득 앞으로도 계속 늦게 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아내에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