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하는 것 / 전상준
내가 잘하는 것을 적어본다. 강사는 도화지 위에 그린 양손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맞추어 쓰라고 한다. 가소롭다. 다 해야 열 가지가 아닌가. 왼손에는 집 안 청소하기, 아이들 불만 들어주기, 딸아이 퇴근할 때 문 열어주기, 아내 잔소리 듣기, 열심히 건강관리 하기, 오른손에는 착하게 살기, 다른 사람 말에 유연성 갖기, 놀 때는 즐겁게 일할 때는 열심히 하기, 내 생각과 느낌을 글로 남기기, 재미있게 취미생활 하기, 쉽게 보일지 모르나 손가락마다 채우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노인상담활동봉사자 교육을 받고 있다. 교육과정 중 대담자의 말문 열기 실습이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과 무엇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일상생활에서도 낯선 사람을 만나 나누는 첫말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상담하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닌가. 무엇인가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기 위해, 아니 답답한 가슴을 뚫고자 찾아온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고 답답한 가슴과 아픈 마음을 가감 없이 토로케 해야 한다.
잘한다고 쓴 것을 두고 다시 한 번 생각하란다. 상담 기법을 배우다 보니 내가 내담자가 되어 상담을 받는 기분이다. 왼손에 쓴 것은 퇴직 후 줄곧 하고 있는 것이고, 오른쪽에 적은 것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그렇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 포함되어 있다. 내 삶이 참으로 작은 것, 사소한 것에 머무르고 있다.
내담자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당장 내가 내담자의 입장이다.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료의 것을 보니 차원이 다르다. 대부분 봉사에 관한 이야기와 직‧간접으로 남을 도와준 것이 들어있다. 또 마음을 비웠다든지 지금껏 하지 못한 것을 이룩하기 위해 엄청난 열정을 쏟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삶에 대한 꿈이 크고 비전이 대단해 괜히 마음이 위축된다. 지금까지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남을 위한 배려도, 대국적 견지도 부족했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일을 잘한 일이라고 하고 있음이 부Rm럽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나의 과거가 보인다. 젊은 시절에는 집안 청소를 한 일이 없다. 직장을 다니며 돈 벌어 온다는 핑계로 아내가 바빠 종종걸음을 쳐도 멀뚱멀뚱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의 불만도 귀 밖으로 흘리고, 아내의 잔소리는 곧바로 시비로 번지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건강 챙기는 일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법 열심이다.
지금껏 많은 사람과 다툼이 있었다. 그때마다 올바른 쪽에 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관대하지 않았으며 시간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내 삶의 흔적을 글로 남기는 일도 나이 쉰을 넘긴 후다. 취미 생활 또한 삶에 쫓겨 다양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주위 사람이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모습에서 스스로 위로해 본다. 본래 인생이란 바라는 대로 다 이루기가 쉽지 않다. 만약 그런 삶이 있다면 판타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일에도 목숨 걸지 않았고 내 힘이 닿은 에까지 노력해 성취될 때 좋아했고, 안 될 때는 다른 생활 방식으로 살아왔다. 다르게 살아온 길이 애초에 가고자 했던 것보다 나빴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삶에 본디 바라는 대로 된 것보다 못 이룬 게 더 많지 않은가.
대학을 입학할 때만 해도 행정공무원이 되고자 했다. 하나, 졸업 후 교직에 첫발을 딛고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길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삶이 외길이 되어 4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덕분에 지금껏 보람 있게 살았으며 아이들도 공부시켜 자립하게 했다. 지금은 매달 얼마간의 연금을 받아 노후생활에 안정을 얻고 있다.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작할 때는 최선을 다해 선택했으나 결과는 늘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내가 내담자의 인생 여정에 도움을 주겠다고 공부하고 있다.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해 주저하는 사람에게 가슴을 열고 지금까지 보던 창이 아닌 다른 창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도와주려 한다.
가치 있는 삶은 자신이 만들거나 다른 사람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을 다시 음미해 본다. 비록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하고 있고, 할 것이다’는 사실에 위로로 받고 싶다. 앞으로 상담봉사자로 활동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늘 적어본 열 가지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응시의 그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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