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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하늘 가는 길[天路歷程] / 권중대

하늘 가는 길(天路歷程) / 권중대 

 

 

도서관을 옆길로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고 멀어서, 제법 가쁜 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아카시아 숲을 뚫고 직선으로 뻗은 까마득한 층계 위로는 손바닥만한 하늘만 보였고, 그래서 학생들은 이 길을 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고 즐겨 불렀다. 공부를 위하여 도서관에 오르는 수고를, 하늘 가는 고행에 빗대어 대학생다운 표현을 한 것이다.  

5월 초순이었다. 모처럼 강의가 없어서 한가한 마음으로 그 길을 오르다가, 여유롭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자연이 보여 주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것은 둘레가 가는 톱니로 둘러싸이고 반지르르하게 윤이 흐르는 연두색의 새잎이었다. 신록의 아름다움이 결코 꽃에 뒤지지 않음을 그때에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꽃이 네온 불빛에 휩싸여 들뜬 도회지의 빌딩이라면, 그것은 함초롬히 안개비를 맞고 있는 전원의 아담한 초가집이었다. 레이스와 반짝이는 구슬을 수없이 매어 놓은 옷으로 치장한 30대 여인이 꽃이라면, 야들야들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새잎은 잘 감은 생머리를 목뒤로 자주 젖혀대는 소녀였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 많은 것이 잊혀졌어도, 그때 보았던 그 조그만 잎의 모양과 빛깔과 윤기를,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진달래나 벚꽃 구경보다, 새잎이 빨리 나오는 조용한 양지쪽 숲으로 가서 다시 온 봄을 즐긴다. 거기에서는 꽃의 현란함 때문에 미처 보지 못한 섬세한 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새소리, 물소리, 땅에서 오르는 훈김,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 오랫동안의 겨울잠 때문에 오그라진 다리로 서투른 걸음마를 다시 해 보는 이름 모를 벌레들, 솟아오르는 새싹 등, 봄의 모든 것이 그 곳에 있다.  

모두가 지나가고 변하여 다시 오지 못하지만, 거기에는 시간이 되돌려진 듯 천로역정에서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새잎이 있었고, 그때 그 시절의 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물이 위로 위로 오르다 못해, 나무껍질 밖으로 질질 새어 나와 흐르는 것도 그때 그대로다. 나무로 물이 오르고 햇빛을 받아 꽃과 새잎을 만들기 때문에, 결국 봄은 물의 조화라고 할 만하다. 쓰다 남은 털실 뭉치처럼 마구 헝클어진 덤불들도 물이 오르면 회초리같이 가늘던 가지가 제법 두툼해지면서 나뭇가지로서의 가닥이 잡혀 간다.  

생명의 존재 여부는 물과 직결된다. 생명이 있으려면 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더라”라는 구절이 있는 걸 보면, 창세 전에 이미 생명의 근원인 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만드는 상처는 여기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이 예쁜 새잎이 그 아름다운 모양을 오래도록 지니고 있지는 못하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오르던 그 길에서 만난 새잎은 그때 그 모습이 아니었다. 반들반들하던 윤기는 간데없고, 먼지가 앉은 까칠하고 초췌한 모습에 붉은 반점까지 돋아 있었다. 사람과 짐승의 손에 상하고 벌레에 먹히고 비바람에 야위어 가며 퇴색하고 찢기면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새잎 같은 청순함을 마지막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많은 일들에 휘감기면서 변질되고 상처받으면서 늙어 간다. 나뭇가지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그냥 놓아두지 않는 것이다. 물이 오르면 꽃이 피고 새잎이 난다. 가을이 되어 나무가 마르고 낙엽이 지는 것은 물이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사람 역시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어서 물오르는 사춘기에는 꽃이 피듯 아름다워지고, 물이 내리는 노년기에는 몸이 마르고 머리에 하얀 낙엽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라는 것은 태어나서 물 한번 올라 청춘을 구가하고, 물이 빠져 나가며 늙는 과정에 불과하다. 생즉사(生卽死)라 했으니 태어나는 것이 곧 죽는 것이라면, 사람의 삶이나 나뭇잎의 삶이 모두 하늘 가는 길, 곧 천로역정(天路歷程)이 아니겠는가.  

누가 먼저 가든 내일은 또 남은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예고도 없이 찾아올 그날까지, 우리는 힘든 도서관 길을 쉬지 않고 오르는 시지프스의 수고를 계속하면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