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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양귀비꽃 / 이순금

양귀비꽃 / 이순금

 

 

쑥갓을 닮은 이파리를 가진 양귀비를 처음 본 건 우연이었다. 봄에 채소 씨앗을 뿌렸는데 잎의 모양이 남다른 것 하나가 싹을 틔웠다. 그것은 외톨이가 되어 혼자서 속잎을 키우고 줄기가 굵어지며 제법 튼실해졌다. 봄의 기운이 무르익을 때 외톨이의 모습에 변화가 왔다. 몸통이 굵어지고 미끈한 줄기에 긴 목이 생겨났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여인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갸름하고 둥근 머리가 수줍게 고개를 살짝 숙인다. 숙인 머리가 점점 가슴에 닿을 정도로 디귿형으로 무게를 더한다. 몸통 마디마디에 새 가지를 치고 그 목에 또 머리가 생겨난다. 모두가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겸허한 자세로 다소곳이 서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태양이 뜨거워지면 그녀의 몸에 에너지가 정수리로 역류하는 때가 찾아온다. 나이는 스물한 살쯤, 젊은 피가 요동칠 때면 그 떨림을 누르지 못하고 머리는 하늘을 꼿꼿이 일어선다. 힘을 준 목과 머리는 그녀의 생애에 절대 다시 숙이는 법이 없다. 분출되는 그녀의 정열은 꽃봉오리를 풍선처럼 터트린다. 꽃잎 아래쪽엔 인고의 흔적 같은 검붉은 낙인이 찍혀있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짧은 생의 각혈처럼 진한 호소를 전지며 요염하게 웃고 있다. 가장 놀라운 변신의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푸른 바람이 그녀를 희롱한다. 한 겹 비단 치마가 접혀 올라간다. 속옷이 보인다.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절차대로 내의를 갖춰 입고 있다. 그 당당한 표정에 바람은 무안해서 도망친다. 세상을 향해 이틀밖에 미소 짓지 못하는 그녀, 첫째 날 해가 설핏해지면 대하조개가 살포시 입을 다물듯이, 아니면 두 손바닥을 합장하듯이 꽃잎을 오므린 채 첫날밤의 임을 기다린다.

그녀를 보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리다. 붉고 강렬한 눈빛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주저리주저리 눈물 되어 흘러내리는 그녀의 짧은 생의 통한을, 내 가슴으로 받아 내기가 버겁다. 붉은 빛이 망치가 되어 꽝꽝 가슴을 때린다. 숨을 고른 뒤에 시선을 허공으로 돌려본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가까이 다가서면 관능이요, 물러서면 슬픔이라.”고 아름다움도 지나치면 두려움이 되고 고통이 된다.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오르면 그녀는 다시 우아한 모습으로 단장하고 세상과 이별을 준비한다. 흐트러지지 않는 도도한 자세로 아직 접지도 않은 붉은 꿈들을 급하게 확~ 허공에 던져 보낸다. 부귀와 영화와 화려한 날들을 미련 없이 떨쳐 보낸다. 못다 한 얘기와 비밀들은 초록의 궁전에 꼭꼭 숨겨놓았다. 삼장법사의 두상을 닮은 그녀의 비밀 궁전은 신비스럽다. 초록의 둥근 지붕을 연보라색의 꽃술로 둘러싸고 그 위에 연한 미색의 꽃가루를 솔솔 뿌려 놓았다. 그 비밀궁전 속에는 그녀의 사랑과 한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있다. 수많은 사연을 끌어다가 새까맣게 셀 수 없는 씨앗들을 만들고 있다. 그 궁전에는 때가 되어야만 열리는 자동의 문이 있다. 비밀의 씨앗들이 새까맣게 여물면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문이 스르르 열리어 까만 비밀들을 쏟아 놓는다.

화려했던 날은 가고 본연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눈길 한번 주는 이 없는 시간 속으로 돌아와 서 있다. 인내하고 겸손해야 하는 침묵의 시간 속으로 말이다. 앙상한 줄기에 모든 회한 묻어 놓고 동그란 희망 하나 머리에 얹고 서 있다. 단 이틀의 화려함을 위해 나머지의 시간을 인내해야 하는 양귀비꽃. 그 도도함과 불타는 자존심은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