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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징검다리에 대한 상념 / 정태헌

징검다리에 대한 상념 / 정태헌

 

 

 

안개 낀 낯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저편 건물에 층층이 내걸린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이건만 찾으려는 간판 이름은 자욱한 안개에 가려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쪽으로 재우쳐 걷다가 한쪽 다리가 휘청하더니 그만 허방다리에 빠지고 말았다.

캄캄한 수렁이었다. 활개를 저으며 발버둥을 쳤으나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바리작거리다가 깨어나니 땀이 등에 젖어있었다. 꿈결의 갈피를 되작거려 보았지만 간판 이름은 안개에 묻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쉬움과 무력감이 밀려왔다. 주위를 찬찬히 살피며 발걸음을 조심했더라면 그런 낭패를 겪지 않았을 텐데.

허방다리에 빠지는 일이 꿈속뿐이겠는가. 대낮에도 갈팡질팡하다가 헛발을 짚는 때가 빈번하다. 어찌 발걸음뿐이랴. 어디가 마른자리고 진자리인지, 가야 할 길인지 말아야 할 길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변통머리가 서툴고 마음자리가 엽렵하지 못해 곤경에 놓이면 우두망찰하기 일쑤다. 세상사에 날렵하게 움직이며 탈 없이 잘도 겯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하여 이즘은 앞길에 징검다리도 있으면 딱 좋겠다 싶다.

유년의 그 징검다리,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목에 개울이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처음 놓였다. 그전에 개울 저편으로 에돌아 다녀야 했는데 막상 징검다리 앞에 서니 관자놀이가 사뭇 놀뛰었다. 가슴이 콩닥거렸으며 발을 헛디뎌 개울에 빠지면 어쩌나 싶은 조바심이 발목을 붙들었다. 하나 차츰 신발을 벗지 않고도 너끈히 건널 수가 있었고, 물살 위로 건너뛰는 재미 또한 그만이었다. 때론 징검다리 중간쯤에 쪼그려 앉아 흰여울 속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물에 반쯤 잠긴 디딤돌 주변에는 피라미 떼가 맴돌고, 운 좋은 날은 모래무지나 암청색 가로띠가 있는 갈겨니를 만날 때도 있었다.

차를 몰고 한적한 근교로 향한다. 오늘도 세상눈이 어두워 헛발을 짚고 나니 열패감이 든다. 징검다리가 없더라도 무사히 건널 수 있다면 좋으랴. 스스러운 마음을 다독일 겸 징검다리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팔랑대고 구름발치에 먹장구름이 무겁게 흐르더니, 그에 작달비가 쏟아진다. 빗길을 한 마장쯤 달리다가 소읍(小邑) 들머리에 차를 세운다. 차 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려대는 빗방울 소리가 그날의 양철지붕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 되면 남해 바닷가에 있는 외삼촌댁에 놀라 가곤 했다. 무엇보다 외삼촌을 따라 갯가에서 낚시하는 재미 때문이었지 싶다. 외삼촌은 다감한 목소리로 낚시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곤 했다. 한데 그해에는 장마철이어서 뙤창으로 비 오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지내야만 했다. 집은 빛바랜 양철지붕이었는데 지붕이 샜던지 툇마루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외삼촌은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무어라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심심했던 터라 외삼촌을 따라나섰다. 외삼촌은 창고로 가더니 양철 조각을 들고 나와 내게 들고 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사다리를 가져다가 처마에 걸쳐 놓고 양철 조각을 받아들더니 지붕 위로 올라갔다. 외삼촌의 다른 손에는 망치와 못이 들려 있었다. 외삼촌은 빗물이 새는 곳을 찾아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나는 외삼촌을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외삼촌은 걷기를 멈추더니 이래에 있는 어린 조카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조심해야 한단다. 지붕 위를 걸을 때는 못 박힌 데를 살펴서 살살 밟고 다녀야 안전한 법이지. 그 밑에는 통나무 받침이 있거든. 그게 사람의 무게를 받쳐주는 거야. 아무 데나 함부로 밟고 다니다간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단 말이야.”

외삼촌은 비가 스며들 만한 데를 찾아 양철 조각을 덧대고 망치로 못을 여러 차례 쾅쾅 내리박았다.

차 지붕을 두드리던 빗발이 성기어진다. 설핏하던 바깥 풍경이 차츰 눈에 들기 시작한다. 읍 들머리 왼편, 야트막한 언덕바지에 자리한 적색 벽돌집이 눈에 들어온다. 종루 위에는 십자나무가 세워져 있다. 그 앞에서 내려 머뭇대다가 문을 밀고 들어선다. 긴 나무의자가 나란히 놓인 내부는 아늑하고 적요하다. 아무도 없다 여겼는데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면엔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한 사내가 십자나무에 못 박혀 매달려 있다. 양팔과 발, 못 박힌 세 곳의 상처가 선명하게 돋아 올라온다.

그 상처를 징검다리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눈에 띈다. 그 무량한 흔적들을 묵연히 바라보다가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온다. 징검다리는 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설 때보다 발걸음이 조금 더 가볍다. 하나 그때 외삼촌의 나이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발길이 서툴기는 여전히 마찬가지다. 양철지붕 위에서 이치던 외삼촌의 목소리가 아직도 빈약한 내 발목을 휩싸고 돈다.

머츰하던 빗발이 다시 듣기 시작한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장마가 진 모양이다. 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귓바퀴를 바싹 세우며, 정작 무엇을 징검다리 삼고 살아야 할까. 세삼 옴씹는다. 아직도 징검다리 타령이나 하는 자신이 스스로 짓쩍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랴. 됨됨이가 늦돼서 그런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