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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싸리꽃 필 무렵 / 정태헌

싸리꽃 필 무렵 / 정태헌

 

 

 

 

저게 누구인가. 숲의 강에서 찌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저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눈에 설지 않은 뒷모습, 늙숙한 사내 절쑥거리는 산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네. 근자 들은 바 있어 짚이는 사람이다. 할머니의 무덤 앞, 서늘한 햇살이 비껴든 혼유석(魂遊石)에 홍싸리꽃 두어 가지와 빈 술병이 놓여 있다. 그래 만조 아재로구나.

삼봉산 자락 산촌에 만조가 흘러든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뜬금없는 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끈 떨어진 신세가 된 만조는 읍내 장터 국밥집에서 손대기로 있었다. 한데 주인마누라의 구박을 보다 못한 지물포 주인이 금령댁을 붙잡고 딱한 사정을 풀어놓았다. 생각 끝에 금령댁은 일가붙이라며 만조를 빼내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섰다. 제수 마련하러 장에 간 사람이 구중중한 낯선 아이를, 게다가 절름발이를 끌고 집에 들어왔으니 누군들 반기겠는가. 금령댁은 지아비로부터 된통 지청구를 들었지만 통사정하여 가까스로 만조를 외양간 머슴방에 들였다. 사고무친 만조를 꼴머슴 구실삼아 거둬주고 싶었던 거였다.

만조야 만조야.’하며 친자식들과 분별없이 챙기고 다독였던 금령댁, 그 그늘 아래서 어느새 코 밑이 거뭇해지고 뼈대가 굵어져 제법 사내 꼴을 갖춘 만조. 스물 댓 살의 사내가 되었다. 그날 해질녘 만조가 싸리나무 붉은 꽃가지를 지게 풀짐 위에 꽂고 돌아오는 것을 지긋이 바라본 금령댁은 마음을 굳혔다. 금령댁은 자신이 좋아하는 홍싸리꽃보다는 만조의 벌겋게 물든 가슴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만조에게 짝을 찾아주어야 할 때가 되었는가보다 여겼다.

마을에 들락거리는 소반 장수에게 말을 넣어 처자 하나 물색한 후 만조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이어 텃밭 옆에 방 한 칸과 이부자리 마련하고 개다리소반에 솥단지 걸어 살림을 내주었다. 사모관대와 원삼 족두리는 없었지만, 비록 처자가 살짝곰보였지만 신랑 또한 내세울 게 없는지라 고르고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인연 맺어 살붙이고 살다 보니 간간 웃음소리 번져 나오고 몇 가지 세간도 들였으며 딸도 하나 낳았다. 그런 만조네를 건너다보며 금령댁은 사뭇 흐뭇하기만 했다.

한데 어느 때부터 만조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슥한 밤인데도 밖에서 서성이는 만조의 그림자가 어름거렸으며 아낙의 울음이 앙알앙알 밖으로 흘러 나왔다. 금령댁은 궁금 반 걱정 반으로 다그치자 만조는 지랄병이 들었다며 투덜댔다. 이를 어쩐담, 간질병이 도졌구나. 차츰 아낙은 횡설수설하며 방바닥을 나뒹굴기도 하고, 토악질하다가 게거품 물고 눈자위 뒤집힌 채 나자빠지곤 했다. 금령댁은 보다 못해 아낙을 데리고 읍내 병원 출입을 해보았지만 별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아낙은 자지러지고 바르작거리다가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작살비 오던 대낮, 만조가 눈 물꼬를 보러 간 사이 방문 고리를 안에서 걸어 잡고 입에 독약을 털어 놓고 말았다. 아낙의 통절과 어린 딸년의 울부짖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는, 툭 하는 둔탁한 소리만 남긴 채 동백꽃처럼 통째 떨어진 후였다. 웅성대는 동네 사람들 너머엔 상기도 목 놓아 우는 딸년의 울음소리만 빗속에 낭자했다. 만조는 입을 꾹 다문 채 제 손으로 아낙을 산자락에 평토장으로 묻고 말았다.

떼꾼한 눈으로 산자락 쪽만 바라보는 만조를 보다 못해 금령댁의 발걸음은 다시 바빠졌다. 친정 갯가까지 가서 수소문 끝에 반벙어리 앳된 색시 한 명을 데려왔다. 한데 서로 말귀가 트이며 오순도순 살 때쯤, 색시는 산에서 캐온 독버섯을 잘못 먹고 손수레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죽고 말았다. 만조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말았다.

이듬해, 금령댁은 또 아랫마을에 사는 젖먹이 하나 딸린 젊은 과부에게 넌지시 말을 넣어 세 번째로 맞아들였다. 한데 그 과부는 먼 산 바라기 일쑤더니 석 달도 되기 전에 우물 파러 다니는 타관 사내와 눈 맞아 콩밭에 삼태기와 호미 자루 내던지고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어깨가 주저앉은 만조는 밤낮으로 강소주를 마셔 대기 시작했다. 금령댁의 다독임에도 투덜대기만 할 뿐, 한 점 혈육 딸년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일손을 놓아버린 채 술에 빠진 만조는 어느 날부턴가 밤이면 유리 등불을 밝혀 처마에 매달아 놓은 삼거리 주막집으로 향했다. 치맛자락 추어올리고 박가분 허옇게 바른 주모와 수작을 떨며 술독에 빠지기 시작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그때마다 남편 곱사등이는 주막에서 나와 신작로 미루나무 밑에 쭈그려 앉아 반딧불이 마냥 깜박깜박 줄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아주까리기름 바르고 궁둥이 흔들며 오가는 사람 방으로 불러들여 주머니 속을 알겨내는 주모가 어떤 짓을 부리는지 소문이 자자한 터라 금령댁은 걱정이 갈수록 쌓였다. 자정이 넘도록 기다렸다가 만조를 붙잡고 달래며 나무라기도 했지만 만조는 이미 주모에게 홀라당 빠진 후였다. 병 깊어 몸져 누워버린 금령댁으로서는 더는 만조를 붙들거나 손을 쓸 기력이 없었다.

무논에서 개구리 짝자글 울던 날 밤, 만조는 한마디 말도 없이 마을을 떠나고 말았다. 밭뙈기 몇 자락 사려고 그동안 뼈품 팔아 묶어두었던 새경은 곱사들이 마누라 치맛속에 통째 바쳐버리고만 후였다. 금령댁은 며칠을 두고 가슴 움켜쥐더니 병이 더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기댈 데라곤 없는 만조가 가면 어디로 갔겠는가. 출상 날 상여 오르던 산자락 저편에서 서성이던 만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을 금령댁 부고가 근동에 돌았을 때 어찌 얼굴 밀고 동네에 들어설 수 있었으랴. 그리고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데 이태 전부터 금령댁 무덤가에 가끔 서성이는 한 늙숙한 사내의 모습이 마을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하여 만조 아재! 홍싸리꽃을 혼유석에 놓고 금령댁과 뒤늦게 마주하였구나. 그 세월 눌러두었던 속울음을 오랜만에 쏟아냈을까. 술 한 병은 금령댁에게 올리고 한 병은 독작하면서 모진 실타래 풀어냈겠지. 하여 낮술에 걸음걸이가 저리 절쑥절쑥 오르락내리락하였구나. 산다는 것은 때론 살아온 날들을 지우는 일, 산을 오르고 내리며 무엇을 한탄하고 무엇이 지워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꽃상여 타고 금령댁이 오르던 그 길을 만조 아재 되짚어 내려가네. 구국구국 멧비둘기소리 들려오는 바람 찬 가을 속을 절쑥거리며 내려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