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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하느님의 손도장 / 최민자

하느님의 손도장 / 최민자    


 

 

동네 미용실에 새 아가씨가 왔다. 배꼽티에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검은 롱부츠차림으로 좁은 미용실 안을 종횡무진 누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피어싱을 한 배꼽 언저리에 달랑거리는 반짝이 액세서리가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손님의 대부분이 여자인데다 나 또한 같은 여자인데도 공연히 민망하고 곤혹스러워 의자에 앉자마자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고 생각하니 좀 우습다. 배꼽이 어쨌다고, 왜 민망해 하는가. 부끄러워 꼭꼭 숨겨두어야 할 만큼 무슨 죄라도 졌더란 말인가. 생각해 보니 인간의 신체에서 배꼼처럼 점잖은 구석도 없다. 웃지도 않고 소리 내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거나 게걸스레 음식을 삼키지도 않는다. 아프다고 칭얼대지도, 무엇이 그립다고 보채는 법도 없다. 옛 우물처럼, 분화구처럼, 배꼽은 그저 고요히 있다.

 

배꼽은 시원(始原)의 흉터, 임무가 종료된 과거완료의 매듭이다. 우리 생에 최초로 낸, 서럽지도 않은 이별의 흔적이다. 빛바랜 유공훈장같이, 잊혀진 먼 나라의 기념뱃지같이, 꾀죄죄한 형색으로 물러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배꼽을 그저 과거의 업적이나 우려먹는 퇴역장군 정도로 치부하는 건 결례다. 배꼽 없는 배란 눈금 없는 저울과 같아서 상상만으로도 매가리가 없고, 배꼽을 중심으로 상반신 하반신을 구분하기도 하니 배꼽이야말로 사대육신의 복판에 찍힌 화룡정점의 방점이 아닌가. 배꼽이 해부학적으로 신체의 무게중심에 해당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심신의 정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단전(丹田)의 랜드 마크로서 배꼽은 아직도 어엿한 현역이다.

 

배꼽은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절,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의 내부에 온전히 의존적으로 착생하여 존립하였음을 입증하는 유일무이한 증표다. 신체의 다른 어떤 기관도 한 개체와 다른 개체가 한 줄의 끈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명쾌하게 설득하지 못한다. ‘신은 가시면서 배꼽 위에 어머니를 조금 남겨두고 가시었으니라는 김승희 시인의 시구대로, 배꼽은 우리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목숨이거나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줄줄이 생산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스럽게 각인시킨다. 내 배꼽에서 어머니의 배꼽으로, 어머니의 배꼽에서 할머니의 배꼽으로. 홀맺힌 끄트머리를 조심조심 풀어 인연의 탯줄을 거슬러 오르면 생명의 원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저 하늘 너머 우주의 배꼽까지 당도할 수 있을까. 최초의 어머니 이브에게도 배꼽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배꼽은 어쩌면 생명 탄생과 성주괴공의 이치까지를 함구하고 있는 비밀스런 입술일지도 모른다.

 

배꼽은 혐광성이다. 지갑 속 고액수표처럼, 화분 속 쥐며느리처럼, 배꼽은 햇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애써 숨기기도 전에 그것은 스스로 부끄럼을 타서 뱃살 깊숙이 숨어 버렸다. 인간이 아닌 다른 포유류의 배꼽은 더 깊이 숨는다. 태어나 얼마 지나기 않아 피부 안으로 말려들어버리는데다 직립 보행이 아니다보니 눈에 얼른 띄지도 않는다. 과일의 배꼽도 마찬가지다.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의 배꼽은 꼭지의 반대편, 꽃받침이 붙어있던 자리를 일컫는데 이 또한 불랙홀처럼 중심축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다. 어느 봄날 꽃이 피었고, 암술과 수술이 가려운 데를 부벼댔고, 그리하여 닿은 자리가 부풀어 올랐음을, 시든 꽃자리가 수줍게 증언한다. 지나버린 사랑의 흔적이, 들키고 싶지 않은 지난 봄날의 정사(情事)가 부끄러워 배꼽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숨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디자이너 루이 레아가 비키니를 처음 선보였던 2차 대전 이후까지 배꼽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서구사회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외설이었다. 전후의 미국영화에서조차 배꼽 노출은 가슴 노출보다 더 큰 이유였다. 배꼽이 빛을 쏘이게 된 것이 생각보다 오랜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제 배꼽은 저 능청스런 인도 철학자 오쇼라즈니쉬가 유쾌하게 능멸한 대로, 누워서 감자 먹을 때 찍어먹을 소금이나 덜어두기 위한 곳은 아니다. 배꼽티에 배꼽 찌에 배꼽 성형까지, 젊은 여성들의 섹시 아이템으로 당당하게 등극해 버렸다. 배꼽의 도발, 아니 배꼽의 반란이다.

 

어깨에 내려앉은 내 머리카락을 미용사가 탁탁 소리 내어 털어낸다. 나는 가늘게 실눈을 뜨고 시들어 떨어진 꼭다리 같은 그네의 배꼽을 곁눈질한다. 한 때 꽃이 피었다네, 한 때 사랑이 있었다네 라고, 배꼽이 가만히 고백성사를 한다. 그 꽃의 이름은 남녀상열지화(男女相悅之花), 그러한즉 사람이란 남녀상열지과(男女相悅之果)런가.

미용실 창밖으로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몸 한 가운데 해독불능의 상형문자를 화인처럼 깊이 새겨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는 사람들. 배꼽은 어쩌면 삼신할머니가 불기를 찰싹 쳐 세상 밖으로 내치는 순간, 간절한 마음을 눌러 찍은 신의 마지막 무인(拇印) 같은 게 아닐까. 불신과 편견이 가득한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털도 없고 비늘도 없고 사나운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갖추지 못한 목부 한가운데에 자나 자와 같은 보증의 손도장을 마침표 삼아 꾸욱, 누르셨을 것이다. ‘메이드 인 헤븐에 불량품은 없을 터, 그대 이제 아시려는가. 꼭지 떨어진 낙과처럼 땅위를 구르는 우리 모두, 까다로운 검품과정을 너끈히 통과해 낸 천상의 특제품들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