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과 누름돌 / 이호철
고향 집의 마루 아래에는 디딤돌이 있었다. 대청마루가 좀 길긴 했지만 두 군데에 놓여 있어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엄마의 손길 때문인지 부엌과 가까운 거리에는 어린아이를 위한 2단 디딤돌이었다. 뒤쪽에 제법 큰 돌을 놓고 앞에는 넓적한 돌이 엎드려있는 형상이었다. 등이 약간 나오고 미끄러지지 않게 빗살무늬까지 새겨 가족들은 거북이 돌이라 불렀다. 나는 겁구이 등을 딛고 조심스레 발돋움하며 철이 나기도 전에 혼자서도 높게만 조이던 마루를 오르내리곤 했다.
어머니께서는 여러 면에서 개화적인 사상을 가졌지만, 가정교육만큼은 엄했다. 어머니는 애가 길을 가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스스로 일어나기를 기다리시곤 했다. 처음에는 나도 아프다고 엄살도 부리며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어보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기하고 무릎의 성처를 들여다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얘야, 걸림돌을 항상 조심해야 한단다.”
어머니는 어린 손이 닿지 않는 등 뒤를 수습해주면서 당부를 했다.
“방앗간 집 막내아들은 자빠지면, 엄마야! 대신에 아부지야! 한다며.”
동네 아낙들의 우스갯소리처럼 여느 집과는 대조적으로 아버님께서는 부드러운 면모를 보여주셨다.
방앗간은 보리타작을 마치자 국수를 뽑느라 분주했다.
모내기에 새참으로 국수를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인부들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눈썹까지 하얘져서 누가 누군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당 한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위에 장대를 얹어 폭을 맞춰 묶었다. 기다란 평행봉처럼 보였다. 덕대 밑판에는 바람에 넘어가지 않게 큰 돌을 눌렀다. 여러 개의 덕대를 완성된 덕장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젖은 국수가 장관을 이루었다. 마치 안동포를 널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명절을 앞두고 두부를 만드는 큰 우물가에는 네모난 돌이 줄지어 들어섰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두부를 틀에 안치고 일일이 천으로 감싼 다음 지지대를 놓았다. 그 위에 돌을 얹어 눌렀다. 물을 먹어 윤기가 흐르는 돌들은 크기야 비슷하지만, 생김새는 각양각색이었다.
“이 누름돌이 없으면 두부 모양을 낼 수 없단다.”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끔 소달구지에 나를 태우고 고개를 넘어 매산천으로 갔다. 수석장이들처럼 돌들을 뒤집어 보며 골랐다. 하연 차돌은 장난감을 내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더울 때는 어머니의 조언대로 운동선수를 교체하는 것처럼 두부의 누름돌을 바꾸었다. 위생을 염두에 두고 그랬을 것이다.
연어가 귀천하듯 나도 귀촌을 했다. 먼저 오두막이 필요하여 건축업자를 정하지 않고 아내와 둘이서 평면도를 그려가며 직접 나서 집을 지었다. 집은 높아야 한다는 의견 일치에 따라 마당과 현관은 높이의 편차가 크게 났다. 어릴 때 거북이 돌이 생각나 디딤돌 같은 계단을 만들기로 했다. 계단의 폭은 넓게 하고 단의 높이는 낮추어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노인도 함께 오르내리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자연의 섭리를 가까이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다. 넝쿨작물로는 호박을 따를 자는 없을 것 같다. 토종호박은 수십 미터의 줄기를 뻗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왕성한 성장 동력을 가졌지만 섬세한 부분도 관찰된다. 열매를 맺어 종자를 만들 보금자리의 선택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호박꽃은 태어날 때 암수가 유별하다. 누가 봐도 암꽃은 작은 애호박을 달고 나오니 구별이 쉽다. 많은 암꽃들이 모두 결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호박은 스스로 환경에 따라 한 줄기에 하나둘 정도의 결실을 보기 위해 다른 암꽃들을 도태시키는 경우다. 그런데 선택된 암꽃도 바로 밑에 받침이 없으면 대부분 고사하고 만다. 이럴 때는 얼른 납작한 돌이라도 받쳐 디딜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더러 나뭇가지나 허공에 매달린 호박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제대로 늙어가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서리가 내릴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나왔다. 농사꾼들의 마음을 급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아내가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서리와는 상극인 들깻잎과 콩잎을 직접 나서 따게 되었다. 소금물에 절여 양념을 더해 밑반찬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틀을 꼬박 그 일에 매달렸다. 저녁상을 물리고 돗자리를 폈다. 깻잎과 콩잎을 대략 20장 정도로 가지런히 겹친 다음 끈으로 묶어 두었다.
아침 일찍 고물차를 끌고 그리 멀지 않은 달래강으로 누름돌을 찾아 나섰다. 넓은 자갈밭에서 열심히 돌을 골랐다. 희고 맑아 보이는 차돌을 만났다. 물안개같이 아스라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돌고 돌아 어느새 내 앞에서 멈춘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항아리를 씻어 깻잎과 콩잎을 따로 담았다. 굵은 소금을 녹여 간을 맞춘 다음 물을 잡았다. 물 위에 노출되면 색깔이 검게 변한다는 아내의 조언대로 꽁꽁 묶인 잎들은 소금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볏짚으로 똬리를 만들어 덮고 매끈한 누름돌을 얹었다. 머지않아 숙성되어 식구들의 입맛을 돋울 것이다. 부엌에서 한 발이라도 가까이에서 흙먼지를 이고 있던 거북이 돌이 어머니의 작품이듯 내게는 귀중한 디딤돌이었다. 그렇다고 수월하게 디딤돌만 찾다 멀리뛰기나 뜀틀의 구름판처럼 크게 뛰다 보면 잘못될 수 있다는 묵시를 건네 주던 아버지는 내게 있어 소중한 누름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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