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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승부사 / 김경

승부사 / 김경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내 머리는 점점 복잡해졌다. 건물 주인이 술 한 잔 하자며 불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경우를 가정해 해보지만 낙관적인 주문은 자꾸만 엇길로 빠졌다.

밤이 깊어 들어온 남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말 한마디 없어도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건물이 팔렸으니 석 달 안에 가게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 남편의 가게는 지금의 건물로 확장이전을 했다. 결혼 이듬해 시작해서 한 창 잘 되던 첫 가게는 사 년 만에 주인에게 넘겨주고 수개월을 찾아 헤맨 끝에 지금의 건물을 세내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새 가게를 잡기까지 마음고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벌지 않고 쓰는 돈은 곶감 빼먹듯 술술 빠져나갔다. 알뜰함이 몸에 배어있던 남편은 통장의 잔고가 물 세듯 빠져나가자 이리저리 허둥댔다.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가게 터가 금방 나타나 주는 것도 아니어서 매일같이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동안 서로 눈치를 보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터에 반듯한 건물을 얻어서 지금까지 그럭저럭 꾸려왔다. 둘째가 대학생이 되었으니 벌써 이십 년 가까이 그 자리에서 업을 한 셈이다. 집을 사고, 이사를 하고, 아이들이 성년이 된 시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열심히 일한 남편의 세월이야말로 처음부터 있었던 장면처럼 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그 그림 속에서 빠져나와야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두 아들이 대학생인 때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불안감은 더했다. 계속되는 불경기에, 나이가 주는 무게감까지 더하니 혼란스럽고 당황스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일부러 이십 년 전처럼 거드름을 피웠다. 걱정한다고 달라는 지는 건 없으니 닥치면 닥치는 대로 어떻게 해보면 될 거 아니냐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입맛이 떨어지고 타들어가는 속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이후로 입을 닫고 말았다. 심사가 오죽 복잡하랴 싶어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었다. 느닷없이 가게를 비워달라는 주인의 말에 우왕좌왕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나 있었다. 남편만 믿고 있기에는 시간이 촉박해 나도 어디든 나가서 마땅한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출근을 하면 나도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지나치면서 쳐다 본 수많은 건물들과 상점들은 어찌나 하고 번듯하고 안정감이 있어 보이던지 그 안에서 안전하게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고 있을 사람들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한 자리에서 우리 가족을 책임져준 이십 년이 참으로 고마운 세월이었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또 다시 한 달이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자동차 수리업을 하는 직업의 특성상 건물도 있어야 하고 마당도 넓어야 했다. 긴 세월 동안 늘어난 장비며 시설들을 옮기는 일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어디든 빼곡히 들어서 있는 아파트와 상가들 중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은 없어 보였다.

약속된 기간은 꾸역꾸역 다가오는데 돌파구가 보이지 않으니 퇴근 후에도 발품을 팔아야했다. 우리는 허기진 부엉이처럼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맸다. 또 다시 정착할 곳은 어디란 말인가. 그동안 너무 안이하게 살았나 싶은 자책감과 앞날을 내다보지 않은 우매함을 후회하며 방향 잃은 나침반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피곤한 몸으로 잠에 곯아떨어지면 밤새도록 가게 터를 보러 다니는 꿈을 어지러이 꾸고는 했다.

무엇보다도 한 집안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남편이 걱정스러웠다. 아빠라서, 남편이라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저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때는 내 손에 자꾸만 힘이 쥐어졌다. 직장인이라면 명예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나이요, 운이 없으면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때가 아닌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출발선이 위태로운 나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의 눈에 드는 건물을 찾게 되었다. 목이 괜찮아 보였지만 그 모양이 얼마나 가관인지 도무지 정이 들 것 같지가 않았다. 낡고 허름하여 방치해 둔 냄새가 역력한 곳을 그는 무슨 계략이 있었던지 일언지하에 계약을 했다. 그리고는 건물 재정비에 돌입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친 기색도 없이 용수철처럼 일어나 새 일터로 내달렸다.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건물 벽을 닦고, 칠하고, 기술자를 부르는 등 구석구석 손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우리는 새로운 일터에 몰입했다. 땀과 페인트로 얼룩진 스무 날의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멀쑥하고 어엿한 건물로 탈바꿈했다. 그야말로 환골탈태였다.

한계에 부딪힐수록 강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가. 위기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는 힘을 발휘하는 남편을 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오래된 단골들을 포기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투자비를 감내한 채 그렇게 남편은 생소한 곳에서 발돋움을 준비한다. 얼마나 멀리 뛰기를 할 수 있을지 바라보는 내 마음에도 잔물결이 인다.

이 점프가 마지막이 되리라. 여기서 다시 십 년 쯤 그는 정신없이 남은 열정을 쏟아 부을 것이다. 젊은 날의 패기와 용맹은 없을지라도 남자로서의 자존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그의 또 다른 출발에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