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이 없어 나라가 망한 게 아니다 / 전병덕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懲毖錄)이 막을 내렸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 7년여 동안의 원인, 전황 등 수난상을 기록한 책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류성룡은 다시는 이와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한 저술이었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당쟁의 뿌리는 깊고 깊다. 사사건건 이전투구만 일삼는 당쟁의 역사는 무려 440년이나 되었다. 1575년 김효원과 심효겸의 이조전랑 천거 문제로 촉발된 동인과 서인의 정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왜에 다녀온 김성일과 황윤길이 정점을 찍게 된다. 정사 황윤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두고 안광이 날카롭고 병선을 준비 하는 등 경황으로 미루어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데 반해, 부사 김성일은 쥐새끼 같은 관상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때 왜에 동행하였던 동인 서장관 허상과 김성일의 수하 황진까지 나서서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하며 김성일을 책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왜의 승려 겐소의 정보를 바탕으로 반드시 병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선위사 오억령을 파직하는가 하면,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서두르던 방비마저 중지시키고 말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전 강토는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처참하게 죽어갔으며 수많은 여인네들이 능욕을 당했다.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도록 비참한 현실은 급기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한 사람의, 한 집단의 사리사욕에 눈먼 당리당략의 대가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 희생의 강도가 너무도 처절하고 엄청난 것이었다. 그나마 국가의 안위를 지켜낸 것은 수군과 의병장들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으로 내쳐졌고 의병장 이산겸과 김덕령은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각각 목숨을 잃었다. 조정의 한심하고 치졸한 작태는 난이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도망갈 생각만 했던 선조는 피난길을 따라왔던 호성공신(扈聖功臣)을 86명이나 책정한 반면, 무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8명으로 제한했는데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한 김천일, 고경명, 서산대사 등은 아예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당시 당쟁과 조정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성룡이 눈물과 회한에 젖어 쓴 징비록은 단 한 차례도 징즙(徵戢)의 경종을 울리지 못했다. 오히려 당쟁은 더 심화되고 아전인수의 몰염치로 치달았다. 류성룡 사후 20여 년 만에 발생한 인조 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러하고 난이 끝난 지 20여 년이 된 시점에서 발생한 예송논쟁이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치열하게 사생결단을 하였는가. 성리학의 고루한 지표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속내는 비루한 정권욕에 사로잡힌 졸렬하고 편협한 붕당정치에 불과했다. 그러기에 앞서 그들은 청나라에 굴비 두름처럼 엮여 잡혀간 죄 없는 백성들의 송환과 나라의 재건과 부강에 정성과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얼마나 귀한 인재들이 주기적으로 덧없이 참살 되었던가. 숙종 당시 세 번에 걸친 환국 사건을 떠올려 보면 지금도 참담하고 통탄스러운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 백성들의 삶과 나라의 안위를 깡그리 도외시한 그들만의 당쟁 놀음과 고도의 정치 수완을 발휘한 숙종의 치기로, 뜻있는 선비들은 도매금으로 넘어가 옥석구분(玉石俱焚)이 되어 버렸다. 절정은 대한제국 말기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일본 언론들이 연일 닭장 속에서 ‘친일닭’과 ‘배일닭’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고 조롱하고 풍자하는 가운데도 그들은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해괴한 짓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기어이 일제에 상망을 당하고 만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저열화 · 흉포화 쪽으로 진화된 느낌마저 없지 않다. 어쩌면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과 일제 강점기 등을 거쳐오는 동안 형성된 ―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무산으로, 6·25전쟁 등으로 민족의 정기와 질서가 정립되지 못한 원인도 있을 것이다 ― 약육강식 논리에 입각한 기회주의자의 용렬한 유전인자가 꾸준히 득세해 온 탓인지도 모른다. 류성룡 또한 예외는 아니다. 당시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동조하지 않은 점과 허위 진술로 조정을 기망한 김성일을 방조한 점 등은 유성룡의 크나큰 과오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난을 겪을 때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했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했다.”라는 진솔한 그의 자책마저 허망하게 들리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권율을 의주목사로 적재적소에 천거한 점 등은 공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부 식자들은 작금의 동아시아 정세를 구 대한제국에 비교하기도 한다. 게다가 외국에 나가서까지 기를 쓰고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보란듯이 서울 한복판에서 북한을 칭송하는 무리들까지 생겨났으며, 종북을 방패로 삼아 허언과 망언으로 국기를 흔드는 지방자치단체의 장까지 나타났다.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고 땅 위를 걷는 일이다.”라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승 임제선사의 말을 새겨볼 만한 시점이다. 그렇다. 단순 명료한 것이 진리다. 단면적이기는 하겠지만 동북공정과 힘의 논리 등을 앞세우는 중국인은 음흉 · 교활 · 집요하고, 독도에 대한 야욕과 역사 왜곡 등을 일삼는 일본인은 간악 · 무도 · 파렴치한데, 음흉 · 교활 · 집요하지도 못하고 간악 · 무도 · 파렴치하지도 못하면서, 정의롭지도 못하고 정직하지도 못하면서 파당만 일삼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최악의 갈등과 도그마에 빠져있다. 군납비리 등 부정부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말살된 도덕성,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고도성장에 따른 안전 불감증 문제, 학교와 군대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인간 경시 풍조, 산과 계곡 강과 바다에 넘쳐나는 쓰레기 더미, 도로에서 일상화 된 난폭 운전과 새치기, 흉포화하고 사이코패스화 되는 범법자 등은 이제 낯선 풍경도 아니다. 법과 질서보다는 떼법과 편법이 판을 치고 각광을 받는 세태는, 조용하고 정직한 준법자가 오히려 순진한 바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일부 정치인과 성직자, 가치관이 경도된 사인(私人)과 단체 등의 행태는 그야말로 점입가경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유성룡의 징비록이 없어 나라가 망한 게 아니다. 교훈은 차고 넘쳐왔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의지력이 부족하고 위정자들이 정쟁에 목을 매고 닭장 속에 갇혀 있으면 시대를 불문하고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그만 달라져야 한다. 아니 달라져야만 한다. 단군 이전 태초 우리의 선조들이 큰 활을 쏘던 꿋꿋하고 활달했던 동이(東夷)의 정신을 되찾아,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과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기상과 웅지를 본받아 반목과 질시를 떨쳐버리고 화합과 소통으로, 은근과 끈기의 21C 대한민국을 새롭게 열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나의 알타미라 / 손훈영 (0) | 2016.05.31 |
---|---|
[좋은수필]새마을식당 / 김경 (0) | 2016.05.30 |
[좋은수필]푸른 얼 ‧ 룩 / 김근혜 (0) | 2016.05.28 |
[좋은수필]하느님의 손도장 / 최민자 (0) | 2016.05.27 |
[좋은수필]디딤돌과 누름돌 / 이호철 (0) | 2016.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