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바다 / 홍도숙
섬으로 시집가서 부모님을 여인 어린 시절 시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동구 밖에 부모님이 남기신 넓고 덩그런 외딴집에서 우리 앳된 부부는 동생들을 품으며 그래도 새끼 기러기마냥 오순도순 지냈다.
섬돌 위에 서서 대문너머 먼 데를 바라보면 드넓은 보리밭과 그 건너 바다 사이에 짙푸른 소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바다보다 넓은 무연한 보리밭 끄트머리에 잉크를 지린 것처럼 바다는 아주 조그맣게 보였다. 보리가 자라면서 바다는 더욱 작아졌다. 보리밭이 작은 바다를 업고 기다란 솔숲이 포대기에 띠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때때로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풋보리들을 눕혔다 일으켰다하며 그들을 살찌우고 있었다.
시 외할머니는 길도 없는 보리밭을 질러서 쉬엄쉬엄 헤엄쳐 오시곤 했다. 걸을 때 허리를 ㄱ자로 굽혔던 할머니는 쉴 때는 꼿꼿이 서 있었다. 보릿대에 묻혀 한참 보이지 않다가 더는 숨을 못 참을 때쯤 보리이삭 위로 얼굴을 내밀고 “후이어” 하며 휘파람소리를 내었다. 한 손에 떡소쿠리와 또 한 손엔 손잡이에 갱엿보자기가 대롱대롱 매달린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할머니는 길을 만들며 오시곤 해서 늘 방향이 달랐다. 남쪽에서 오시는가 하면 어느 때는 동쪽에서고 오셨다. 바람이 자는 날 아득한 초원에서 기름같이 잔잔한 보리물결이 장난치듯 해작이면 우린 섬돌에서 내려와 보리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는 감꽃이 피기 시작할 때 낳은 아기를 안고 신랑과 도련님과 애기씨를 대동하고 할머니를 마중했다. 할머니의 옷자락엔 구수하고 달큰한 풋보리 향기가 배어 있었다. 백발을 곱게 빗어서 쪽지고 은비녀를 꽂은 할머니는 참으로 단아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바다를 헤엄쳐와 어미 없는 손자들을 만나고 어린것들의 모습을 가슴에 담고 사래긴 보리이랑을 허리를 꺾고서 나비헤엄을 치며 수평선 쪽으로 사라져갔다.
한국전쟁 직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시기였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에게 축복 같은 기운을 보내주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섬엔 그저 그지없이 평온한 하루하루가 찾아 왔고 삶에 대한 신산한 현실을 심각하게 느낄 겨를도 없이 건성건상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때가 되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을 그때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대로 철없이 즐거웠고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하고 봄부터 뒷산에선 산 꿩이 새끼를 치는지 분주히 울어댔다.
나는 새로 얻은 섬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면서 헤어졌던 식구를 찾은 듯 낙낙함 속에서 첫 아들도 얻었다. 생애 가장 순수한 시절이었다. 생의 끝자락에 와서야 알게 된 숭고한 일상들이었다. 절망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해도 지금 와서 그것이 아름답게 비치지 않을까만 그건 진정 사랑스런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남편과 나는 날마다 그 무엇이 우리를 찾아오기를 갈망했다.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여린 손목을 잡아 일으켜주기를 갈구했다. 그러면서 막연히 기쁜 일이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에 싸여있었다. 어쩌면 할머니는 그 예감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열흘에 한 번쯤 우리는 둥지안의 새끼 기러기처럼 섬돌위에 올라 아득한 지평선 쪽에서 곱게 빗은 보리물결을 해작이며 다가오는 할머니를 기다렸다. 고립된 마지막 요새로 숨어서 다가오는 하얀 구원병을 기다렸다.
나는 보릿대처럼 촘촘한 자동차물결을 헤치며 자욱한 매연 속으로 손자들을 보러가고 있다. 아마도 손자들에겐 그 시절 우리가 섬돌 위에서 할머니를 기다린 것 같은 간절함이야 없을 테지만 그 포근함도 있을까만, 저희야 어떠하든 나는 지금 보리바다를 누비던 할머니의 환생이고자 한다. 양손에 쑥굴레떡과 갱엿꾸러미를 들고, 잔가시처럼 까슬까슬한 보리수염이 허리춤을 간지럼 태우는 보리바다를 끝없이 헤엄쳐가고 싶다. 보리물결 가르는 돛단배가 되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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