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을 날리며 / 전 민
벼락 치는 소리였다.
친구와 함께 사진전을 보려던 계획을 서둘러 접었다. 약속을 미루자는 문자 메시지로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따른 허탈과 놀라움을 전했다. 늘 씩씩하던 친구도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나 아직도 그 사람 좋아하는데….”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꼼짝 못하고 종일 전하는 뉴스 속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이 얽혀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미안한 생각이 드는가 하면 안타깝고, 화가 나는가 하면 연민이 솟았다. 헛헛하고 아릿한 통증.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안에서만 빙빙 돌았다.
감자같이 구순한 그가 좋았다. 투철한 신념 뒤에 숨은 그 여림에 끌렸다. 아니, 힘없는 이들을 쓰다듬는 그의 진정성이 좋았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그가 장하고 대견해서 기꺼이 한 표를 보탰다. 룸메이트는 그의 당선을 못마땅해 했지만 나는 참신한 이미지의 그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다.
그가 탄핵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식구들의 핀잔을 들으며 광화문 네거리로 나갔다. 촛불을 들고 탄핵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경건히 밝혔다. 애석하게도 내 사랑은 그쯤 어디서 멈춰버린 것 같았다. 골치 아픈 정치에 흥미를 잃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물살에 휘둘리느라 그런 정신적 사치를 부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변함없이 그를 지지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해 본다. 가진 자에게도 못 가진 자에게도 인기가 없던 서민대통령. 그를 응원하던 사람들마저 고개를 돌리고 정책을 꾸짖는 목소리가 높아졌을 때 나도 따라서 그를 곱게 바라보지 않았지만 변화에 대한 희망을 아주 버리진 않았다.
내 어설픈 지지에 대한 화답이었을까. 어느 날 꿈속에 그가 들어왔다. 귀찮게 하는 사람이 피신을 왔다며 우리 시골 옛집으로 들어섰다. 런닝셔츠 차림으로 대야에 물을 퍼 담고 푸푸 소리를 내며 세수를 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수건을 건네주고 나는 뒤꼍 풀밭으로 갔다. 초록융단을 펼쳐놓은 것 같은 너른 잔디 위로 나비가 날아다녔던가. 그가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내 옆으로 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와 내가 가위 바위 보를 했다. 그는 주먹을, 나는 가위를 냈다. 그것도 잠시, 낯모르는 사람들이 부리나케 그를 찾으러 왔다. 개구쟁이 소년처럼 그는 얼른 젖은 메리야스를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 틈을 타 냅다 그를 끌어안고 뒹굴었다. 쫒아온 사람들이 가까스로 피해갔다. 삽시간에 나는 그렇게 나무꾼을 숨겨준 선녀가 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을 껴안고 뒹굴다니 예사 꿈이 아니다! 아침이 되자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좋은 꿈은 감추라고 했겠다. 태연을 가장하고 복권을 사러갔다. 새로 다섯 줄, 가로 여섯 숫자가 가지런히 적힌 종이쪽지를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추첨 날이 다가오자 가슴이 뛰었다. 행운 번호가 적힌 공이 기계에서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마른 침이 넘어갔다.
“하여간 놈현은 되는 일이 없다니까. 꿈에 나타났으면 보너스 점수라도 맞게 해야지 이게 뭐야, 뭐냐고?”
달랑, 만 원짜리 한 장이 걸린 나는, 나도 모르게 화를 벌컥 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괜한 사람만 탓했다. 가위 바위 보에서 내가 졌으니 추첨에서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을 팍팍한 삶에 지칠 때마다 정부를 비난하며 걸핏하면 그를 걸고 넘어졌던 사람이 어찌 나 뿐이었을까. 저기 노랑풍선을 들고 강물처럼 일렁이는 사람들 중에도 나처럼 짠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거리로 나선 이도 있으리라.
그의 영혼에는 향기가 있었다. 언젠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자리에서 하느님을 믿느냐고 묻는 질문에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희미하게 믿습니다.”라고 답하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나의 슬픔이다. 딱한 처지의 트럭운전사를 위해 무료변론을 하던,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그의 모습을, 어린 손녀 자전거에 태우고 논두렁길을 달리던 평범하고 정겨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슬픔이다. 힘들고 지칠 때 등 기대듯 부르던, ‘저 들이 푸르른 솔잎을 보라’하는 ‘상록수’를, 다시는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다는 것도 나의 슬픔이다.
무시로 울려대던 전화 소리도 아득히 멈췄다. 애타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좋아하지도 않는 콜라를 거푸 들이마셨다. 왜 그런지 그에게 빚을 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가벼워지고 싶었다. 끼니 두어 번 굶는 것으로 애통한 마음이 사라질 리는 없겠지만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
어떤 이는 그의 죽음을 두고 순교라 하고, 다른 어떤 이는 마지막까지 승부수를 던졌다며 힐난했다. 그가 떠나간 마당에 굳이 그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듬어지지 않은 언행과 세련되지 못한 처세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개혁의 열망을 안고 뜨겁게 살다 간 한 사람, 인간 노무현을 추모하고 싶을 뿐이다. 임기를 마치는 소회를 이야기할 때 그도 인정했듯이, 말본새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가 없는 오늘은 그런 말투마저 못내 그립다. 몸은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저 들녘의 망초꽃 같은 무리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발길들이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으니 그는 외롭지 않으리라. 쓸쓸하지 않으리라.
추모의 열기 속에 며칠을 지내다보니 희한한 일이 생겼다. 마술을 부린 듯, 여러 달 동안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던 마음이 싹 가셔버린 것이다. 자지레한 쓰레기를 휩쓸어가는 큰물처럼, 내 삶의 찌꺼기들을 그가 거두어 간 것만 같다.
찔레꽃 하얗게 무더기로 향을 피우는 계절,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아파트 상가 태권도장에서 내지르는 아이들의 기합소리가 우렁차다. 나는 바람을 불러 내 아음속 노랑 풍선을 하늘 높이 날려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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