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꼭대기 나무 / 정혜옥
내밀한 생각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우리 집 창가에서 올려다 보이는 앞산 꼭대기, 그 높은 곳에 있는 나무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무의 형체만 멀리서 보일뿐 무슨 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집터를 구하러 다니던 젊은 시절, 앞산과 처음 만났었다. ‘산이 저기 있네.’하며 최초로 앞산을 가까이서 보았었다. 산 밑에 있는 집터를 두 번째 찾아갔을 때였다. ‘높고 아름다운 산이네.’ 하고 앞산의 모든 것을 고개를 들어 우러러 보았다. 산꼭대기의 나무들도 그때 처음 눈에 들어왔었다. ‘산 밑 동네에 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산꼭대기와 눈이 마주치겠네.’ 이런 생각도 하였다.
산 아래에 집을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산자락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앞산과 나와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나는 집을 짓는 일, 집을 지키는 일, 자식들을 바라보는 일 등, 땅 위의 삶 때문에 산꼭대기에 있는 존재들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아침 산의 빛남과 저녁 산의 적막함, 빗줄기 사이로 어른거리는 젖은 산의 모습, 비가 그친 후의 더욱 푸르러진 산 빛이며 산길을 희롱하고 있는 흰 안개 떼가 매우 눈부셨지만 나는 그것들을 언뜻언뜻 보았을 뿐, 이내 땅 위로 눈길을 돌렸었다. 그렇게 이십칠 년이 흘러갔다.
이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산을 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어느 오후,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앞산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문득 산위의 존재들이 다시 의식 속을 비집고 들어 왔다. 산 위의 흙이며 산비탈에서 불고 있을 바람과 산골짜기에 고여 있을 물이 생각났다.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는 것은 산꼭대기의 나무들이었다.
무슨 나무일까, 어떤 모습일까, 이름이 무엇일까, 소나무일까, 굴밤나무일까, 팽나무일까. 하고 거기 있을 나무들을 상상해 보았다. 심지어 산딸나무, 마가목, 때죽나무, 하며 집에 심고 싶었던 나무의 이름까지 불러대며 산꼭대기와 나무들을 그려보기도 했다.
나무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가 땅 위에서 아이들과 함께 신이 나 있는 동안,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또 맞이하느라 분주해 하는 동안, 산 밑에서 내가 조금씩 늙어가고 있는 동안, 산꼭대기의 나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름다운 거목이 되었을까,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고 있을까, 궁금하였다. 땅 위의 나무는 바람 따라 온몸을 흔들고 있는데 산위의 나무들은 아무 움직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천년만년 끄떡도 않는 앞산처럼 산꼭대기의 나무도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산꼭대기의 나무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들 곁으로 다가가서 이십칠 년간의 격조했던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산정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였다. 어떤 이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라 하였고 어떤 이는 산을 정복하는 등산가처럼 걸어가라고 했다.
흔들리는 케이블카에 얹혀 높이 오르는 일은 상상만 하여도 머리가 어지럽다. 또 둥산모자, 등산복, 등산화로 무장을 하고 찾아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목적지의 반의반도 못가서 숨이 차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힘도 생각하고 나이도 생각하였다. ‘이룰 수 없는 꿈이다.’ 하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불가능의 결론을 내가 수용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능력의 한계, 그 슬픔도 솟아올랐다.
지금은 오후, 늦은 햇살이 산꼭대기를 물들이고 있다. 산에서 내려 온 새 한 마리가 매화나무에 앉는다. 꽃봉오리를 작은 입으로 쪼아댄다. ‘벌써 봄이구나.’ 하며 새에게 다가가고 있는 사이, 새는 도로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 산으로 돌아가는 새와 손에 잡히지 않는 산위의 존재들, 아무래도 나는 산 밑에 서서 산꼭대기의 나무들을 그리워할 뿐,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산의 형상이 잿빛으로 변한다. 하늘과 산의 경계가 무너진다. 나도 어둠속에 파묻힌다. 이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별 한 개가 솟는다. 지금쯤 산꼭대기의 나무들도 밤잠을 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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