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하동 포구 / 김규련
눈앞에 떨어지는 낙조를 밟으며 산책을 즐기고 있다. 문득 하동 포구의 저녁노을이 안막에 깔려든다.
하동포구는 내 귀가 빠지고 탯줄이 묻힌 고장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걸핏하면 짙은 향수에 잠기곤 한다. 포구 마을의 이이들은 섬진강의 물소리를 익히며 자란다. 강물 소리에도 계절이 깃들어 봄이 오고 가을이 간다.
겨울의 강물 소리는 마음으로 듣는다. 차가운 강바람이 지창을 칠 때 떨리는 문풍지에서 오열처럼 흐르는 강물소리를 느낀다.
우수가 지난 어느 날 새벽, 찡 하고 나루터 빙판에 금가는 소리가 나면 비로소 포구의 한 해는 문을 연다. 지리산 뗏목 배가 떠 흐르고 돛단배도 오간다. 고깃배가 들락거리는가 하면 화물 실은 철선들이 뱃고동 소리를 길게 뽑아내며 닻을 내린다.
천자문을 배우러 서당에 다녀오면 우리는 강변에 나가 둑에 핀 꽃을 따며 소꿉질을 한다. 피라미를 낚아채고 하늘로 치솟는 물새의 묘기를 보고 감탄하기도 한다. 해거름 노을에 붉게 물들어 젖은 몸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여름에는 모래 벌에 나와 성을 쌓기도 하고 멱도 감고 진종일 물고기 떼와 함께 물에서 논다. 가을의 섬진강 물은 유리알처럼 맑고 깨끗하다. 늦가을 석양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고 우리도 어서 어른 되어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강물과 모래톱, 물새와 고기 떼, 산과 들, 배와 아이들, 기러기와 하늘…. 그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하동포구의 소중한 가족들이었다.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 가고 또 왔다 갔다.
어느 해 늦가을 무서리가 내린 강변에 물새 한 마리가 죽어 쓰러진 것을 보고 치마폭에 싸다가 양지에 묻어주던 숙분이가 생각난다. 그 무덤에 들국화 꽃잎을 뿌려주던 그 천사의 동심이 지금도 내 가슴 황량할 때면 강물로 출렁거린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자기 엄마와 함께 하동포구를 떠나야 했다. 우리 집에서 여러 해 같이 살다 가는 그 모녀를 한길까지 나와서 어머니와 나는 서럽게 작별했다. 나는 가슴 속의 성 한 채가 무너지듯 허망하고 쓸쓸했다. 하늘에는 지리산 갈가마귀 떼가 우짖고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이듬해 봄, 내 나이 여덟 살 때 한의사이신 아버지께서 남의 병은 고치시면서 당신의 병은 다스리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상여가 섬진강을 거슬러 산으로 갔다. 상복 입은 형과 나는 뒤 따르며 곡을 했다. 상두꾼들이 요령을 흔들며 불러대는 향도가는 난생 처음 참혹한 슬픔을 깨닫게 했다. 그 날로 내 가슴 오지에 설움 타는 강물 한 줄기 흐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우리들의 돌아다니는 공간이 넓어져 갔다. 하동읍의 안산인 갈마산 섬호정에 처음으로 올라갔을 때 느꼈던 감동과 기쁨은 지금도 가슴 설레게 한다 높은 데서 사방을 둘러보는 순간 진경산수처럼 잠들어 있던 산천초목과 시가지의 집들이 번쩍 깨어나서 큰 소리를 내며 살아 움직였다.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달이 뜹니다….
아득한 구름 사이를 돌고 돌아 흘러내리는 섬진강 육백 리의 물길이 유정했다. 포구 어귀에 펼쳐진 백사청송은 하동의 명승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팔자에 역마살이 끼었는지 낯선 대구 경북 여러 고을을 떠돌며 살고 있다. 첩첩한 산과 그름에 막혀 고향땅을 볼 수는 없어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 하늘에 닿아 있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를 읽으며 화개장터와 쌍계사를 회상해 봤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탐독하며 하동 사투리를 만날 때마다 고향 친구들을 상봉한 듯 기뻤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주인공인 하준구를 내 삶의 한 장면으로 착각도 해봤다.
하동에는 최치원의 지리산 <입산시>가 남아 있는가 하면 이인로의 명시 <섬진강 낙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정공채의 하동 사랑의 시도 있고 이명희의 하동 노래도 있다. 하춘화의 <하동포구 아가씨> 노래도 유행을 타고 있다. 어찌 그뿐이랴. 판소리 동편제의 명창 유성준과 이선유의 고향도 하동이라 했던가.
섬진강의 생기며 영기에 하동의 빼어난 풍광에서 번져나는 정기가 이 곳에 시방 문예의 꽃밭을 풍성하게 일구고 있다. 섬진강의 참게장과 제첩국은 하동의 진미요 문학공원은 하동의 향기요 화개천 십리의 벚꽃 길은 하동 산수의 표상이라 하리라.
귀로에는 땅거미가 깔리더니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고 있다. 고향 그리움의 정도 묻어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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