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 김단혜
“오늘 뭐 해?”
이렇게 물어주는 친구가 있나요? 사람에 치여 사람 때문에 힘들 때 소울 메이트의 문자 한 통에 위로가 되는 날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방 두 개를 들고 다닙니다. 하나는 책, 다른 하나는 카메라입니다. 어쩌면 가방의 무게는 삶의 무게인지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하려면 하기 싫은 일 아홉 가지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친구는 어깨 아프지 않으냐고 물어봅니다. 그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좋아하는 책 한 권도 들 수 없는 날이 온다고 말이죠. 맞는 말입니다. 벌써 신호가 옵니다. 팔목이 찌릿찌릿 저립니다. 어깨가 아파서 잠이 안 옵니다. 목과 등에는 누군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한 시간 말입니다. 마치 활성화 중독에 걸린 것 같습니다. 기운을 바닥까지 써서 체력을 끌어내리고 정신력을 다 소진 시켜야 비로소 안도하는 중독성 말입니다. 그러면서 정신은 허기지고 텅 비어있습니다. 살아가지만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만들지 못합니다. 일상의 찰랑거림과 이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서성입니다.
“그냥!”
이라고 답장을 보냅니다. 이 단어에 하고 싶은 말을 몽땅 넣어서 말입니다. 친구는 압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혹은, 뭐 하는지 말입니다. ‘그냥’ 이라는 문자하나 보냈을 뿐인데 걱정해주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나를 되돌아봅니다. 친구는 바쁜 내게 한숨 돌리라고 합니다. 하던 일 멈추고 잠시 눈을 감으라고 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누군가 나를 오래도록 응시하는 기분입니다. 혹시나 싶어 뒤도 돌아보고 옆도 보면서 친구와 함께 있는 듯 착각이 듭니다. 친구는 그런 존재입니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찾아줍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압니다.
친구는 저녁 어스름이 지는데 불쑥 찾아와, 라면 한 그릇을 끓여달라고 합니다. 손에는 오늘 길 아파트단지에서 주워 온 반쯤 물이 든 낙엽을 들고 있습니다. 저는 말없이 싱크대 서랍 깊숙이 넣어둔 노란 손잡이가 있는 스피드쿡 라면 냄비를 꺼냅니다. 맨 위 눈금에 맞춰 물을 올리고 냉장고에서 소주병을 꺼냅니다. 눈으로 한잔하겠느냐고 병을 흔들어 보이자 입에 재갈이라도 물은 듯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립니다. 소주잔이 넘치게 한 잔 가득 따릅니다. 라면에 양파와 대파를 썰어 넣고 불 조절을 하는 동안 친구는 소주잔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립니다. 잔을 들어 맑은 잔을 쳐다보다 마시지 않고 식탁에 놓습니다.
뽀글뽀글 김이 오르는 라면을 창포꽃 무늬가 있는 사기그릇에 담아 내놓습니다. 친구는 손잡이가 있는 쪽을 당겨 놓고 왼손 숟가락에 라면을 얹고 오른손으론 수주 한 잔을 듭니다. 소주 한 모금 입에 털어 넣고 얼른 라면 한 숟갈을 가져갑니다. 친구는 말합니다. 외로울 때 찾아가 ‘라면 한 그릇’ 라고 말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끓여주는 친구가 있으면 명품 인생이라고 말이죠.
친구가 라면 국물에서 걸쭉한 인생을 숟가락으로 가늠하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옆에 있어줍니다.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라면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친구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할 말을 쏟아냅니다.
기실 친구의 외로움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나잇살이라는 이름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뱃살 때문에 혹은, 남편과의 스킨십이 자꾸만 귀찮아진다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밥하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갑자기 그 잎이 자신인 것 같다고 합니다. 아니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아낍니다.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못한 말 속에 숨은 ‘그냥!’ 우리만의 은밀한 단어가 됩니다.
이런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합니다. 아니 몇 년을 훌쩍 지나기도 합니다. 친구의 명품인생에 제가 오브제로 사용되는 일은 말입니다. 찬바람이 불면 바람 소리와 함께 현관을 들어서는 그녀를 기다립니다.
“그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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