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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강변 여관 / 심선경

강변 여관 / 심선경


 

 

날은 어두워지는데 하룻밤 묵어갈 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를 잡지 못해 저물어가는 강물도 투신한 노을의 붉은 심장이 물너울 위에 낭자하다. 걷다가 무료해져서 허공에 손을 휘저어 보기도 하는데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치켜 올려다 본다. 얼마나 젖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구름의 무게가 얼굴 위로 철퍼덕 내려앉는다.

가까운 숲 속에서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난다. 일찍이 보금자리를 헤치고 나간 새들이 어두워지자 다시 숲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하지만 새는 보이지 않는다. 새소리가 새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인지 아니면 아침에 새들이 떨구고 간 날갯짓 소리만 숲에 혼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물 뱀 한 마리, 강변 둑 길섶에 서성인다. 놈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길바닥에 흑갈색의 기다란 끈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냅다 밟으며 지나갈 뻔했다. 살모사나 까치독사처럼 강한 독성은 없다지만 몸 전체에 징글맞은 가로띠 모양의 흑갈색 무늬가 줄지어 있어 놈의 눈과 내 눈이 맞닥뜨린 것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친다. 흠칫 놀라 뒷걸음치자 저도 뒤늦게 알아챘는지 얼른 갈대수풀 속으로 미끄러지듯 기어들어 간다. 제 딴엔 무심코 물 밖으로 나왔을 테지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난 나로선 아연실색할 수밖에.

언젠가 길벗과 함께 여행길에서 오늘처럼 물뱀을 만난 적이 있었다. 놈은 물에서 나와 둑길 건너편 비탈진 흙벽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자 화석처럼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놈과 같이 길바닥에 얼어붙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길벗은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은 듯 물뱀이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며 숲에 버려진 작은 나뭇가지에 뱀을 칭칭 감아 재빨리 물 속으로 던져 넣어 주었다.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길동무는 물뱀 또한 사람처럼 소중한 생명체라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한적한 길에서는 물뱀조차도 반가워해야할 대상이건만, 놈에게 선뜻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은 겉모습에 대한 선입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평수 좁은 인간의 옹졸한 마음 탓임에랴.

이쯤이면 낡은 여관이라도 하나쯤 있을 법한데 시야에 얼른 들지 않는다. 내게 여유만 있다면 이런 강변에 여관 하나쯤 뚝딱 짓는 것은 일도 아니다. 사위(四圍)가 금방 어둑어둑해지니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져 온다.

내 발걸음을 졸졸 따라오던 흰 낮달이 여기 강변을 걸어오는 동안 어디쯤에선가 붉은 저녁달이 되었다. 저녁밥을 짓는지 시골길 낮은 굴뚝에서 모락모락 오르는 연기를 보면 이승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위에 자꾸만 겹쳐진다. 무어 그리 서러울 것도 없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숙소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딱히 없는데 어둑살이 내리면 괜히 코끝이 맵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발걸음조차 바빠지는 건 왜일까.

산수유 꽃을 닮은 생강나무 꽃, 이름만 그렇고 생강은 하나도 열리지 않는 나무. 그 잎 여릴 때 만나 무성하게 산그늘 될 때까지 그 곁에 꼭 붙어살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하던 생강나무가 가지마다 노란 팝콘 같은 꽃들을 팡팡 터뜨려놓으면 그 눈부신 불꽃놀이를 태고(太古)의 시간 속에 옮겨주어도 좋으리라. 해거름에 울적해져 내 안에서 한동안 머물던 속울음이 바람에 실려, 돌에 새긴 비문 속으로 들어간 뒤에도 강물은 여전히 제 속을 열지 않는다.

이렇게 걷다가 운 좋게 싸구려 여관을 만나게 되면 눈 딱 감고 그곳에 한 열흘쯤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일렁이는 강물 위에 나는 너무도 많은 이름들을 썼다가 지웠다. 강변에 여관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천개의 별이 빠져도 꿈쩍 않고 천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물의 가슴은, 이렇게 하루가 가고 또 오며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요히 깊어간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얼마를 더 걸었을까. 강가를 따라오며 내가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둠이 물의 정수리를 밀어내는 새벽, 희미한 빛을 받으며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모든 소리들이 길을 낸다. 천리향 먼 향기가 바람 끝에 실려 오는 소리가, 이슬이 동그랗게 말려 풀잎을 구르는 소리가, 더워진 물방울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이제야 들린다. 맑은 어둠살 속에서 사라지는 경계들을 강물이 모두 품고 나직하게 흐르는 것이 이제야 보인다.

누군가 이 강변에 숙박시설을 짓는다면 그리 높지 않은 층수로 지었으면 좋겠다. 그곳을 강변여관이라 이름 붙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지만 나그네가 묵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표시만 해두어도 문제 삼을 생각은 전혀 없다. 강변에 지어진 여관에 오래 묵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주인에게 강물의 해작임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삼층 방을 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 높지도 낮지도 않는 눈높이에서 바라다보는 강변풍경은 다른 층보다 한결 아늑함을 줄 것이다. 여장을 푼 뒤 지친 몸을 씻고 나오면 장독 여나믄 개 놓여 있는 여관 앞마당에는 수수꽃다리 향기가 풀풀 날아오르고 담장 아래 버티고 선 은목서 몇 그루가 못 다한 열망의 가슴앓이를 시작하지 않을까. 어둠은 시나브로 강변을 덮어올 것이다. 그때쯤 나는 희미한 사유의 시간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방안에 조그만 촛불 하나를 밝히고 싶다. 촛불을 켜면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 위에서 작은 생()의 업()들이 나무들이 잎맥처럼 선명하게 되살아 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어딘가에서 좀 쉬었으면 하는데 벌써 날이 밝아온다. 강변여관에 오래 묵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접고 오래된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는다. 먼 길 걸어온 나그네에게 지금도 걸을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은 강물처럼 사무치는 그리움에 아직 닿지 못하였다는 전언(前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