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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다시, 동화를 읽다 / 이혜숙

다시, 동화를 읽다 / 이혜숙


 

 

아니, 내가 뭘?” 마치 하늘이 그런 표정이다. 어제까지 곳곳에 물 폭탄을 쏟아 붓던 하늘은 어디 가고 말끔한 파란 하늘에 태양이 작열한다. ‘작열하는 태양오랜만에 써보는 표현이다. 내 심사에 따라 언어가 쫓아다니는데 참으로 한동안 작열하는 태양을 느낄 만큼 내 생활은 열정하고는 멀게 살았다. 하루를 지냈다도 아니고, 견뎠다는 말이 맞았다. 딱히 어디가 쑤시고 부러진 것도 아니다. 있어야 할 내가 없고 온통 같은 어둠의 빛깔이 내 마음 곳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그것에 놀라서 쓰러지는 것이다. 나를 일으켜 세워줄 무엇이 없어졌다고 자꾸만 내 어두운 안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따지고 들어가면 많은 것을 현실적으로 잃어버린 뒤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더 쑤셔보면 어디에 기대고 살아갈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의 아름다움보다 사람의 아픔이 먼저 보이고 있었다. 그 아픔을 고스란히 절망하였다. 스스로 대처할 능력도 상실하고 삶에 대하여 손을 놓아가는 것이다. 깊은 우울증이라고들 했으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존감의 상실에서 오는 무기력이 더 맞다고 나는 나를 진단하면서 그 나락에서 다시 오르려도 버둥거렸다. 나의 신경줄은 점점 약해져 갔다. 외출을 못하고 일 년을 누워서 보냈다.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랬던 나는 요즘 아니, 내가 뭘?”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사동에서 지인 몇 분을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20년을 넘도록 가깝게 함께 보낸 분들이다. 내가 30대였을 때 50대였던 그들이 70이 넘고야 말았다. 모든 게 서툰 내 나이 30대에 인생의 답을 술술 가르쳐 주시던 분들이 말수는 줄어들고 왠지 그 삶이란 것에 겸손해 하고 있었다. 한때 나를 몹시 걱정해 주셨던 분들이기도 했다. “괜찮지?” 그 말속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나는 어깨를 펴며 그럼요.” 하면서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이제 더는 자신들에게 욕심을 버린 지 오래 되었고 잘 뻗어 나가는 아들딸들의 윤기어린 삶에 물을 주는 어른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를 곧추세우느라 정신없을 때 그들은 또 저만큼 가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먼 내 새끼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나이에 바싹 꼬리를 내리게 되고 나는 또 걱정만 얹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냥 세월이 가지 않는다. 반드시 넘어야 할 언덕을 내어 주는가보다. 그런 무게를 잊고자 할 때 나는 동화책을 읽어간다. 힘이 들어 간 문장으로 대놓고 인생의 해답을 심도 있게 알려주는 자기 성찰의 책들을 던져버리고 심각할 필요도 없고 웃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눈길을 쫓아간다.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동화보다 그동안 맹렬하게 진화된 번역동화들이 나를 끌었다. 나는 영국 동화작가 로알드 달이 마음에 든다. 인간의 선악을 고스란히 표현하여 더럽고 잔인하고 태평한 이야기를 보면서 아이들이 걸러지지 않은 잔인성과 일치하여 유쾌하고 단순해서 좋다. 그저 신비하고 환상적이지 않아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을 구체적으로 건드린다. 그가 쓴 <찰리와 초콜릿공장>, <마틸다>를 보면 예전에 내가 읽었던 동화들이 마침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었다면 로알드 달은 거기에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겟에 대하여 혹은 인간의 욕망을 정곡으로 해결하여 주기도 한다. 반드시 가르치려들지 않고 생각하고 질문하게 하여 아이들의 꿈을 건드리고 간다. 내 나이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들었다가는 혹독한 낭패를 보고, 나 역시 남이 주는 충고가 아프기만 하니 동하속의 이야기는 내 입맛인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점점 지워가고 외로워질 때 나는 동하속의 마법사가 아이들의 구세주가 되듯 나의 정서 어디쯤을 문질러 주고 감을 느낀다.

오늘 로알드 달이 쓴 <찰리와 거대한 우리 엘리베이터>란 동화책을 읽었다. 마법의 약을 한 알 먹으면 20년 젊어지는데 욕심 많은 조지아나 할머니가 4알을 먹고 점점 젊어지다가 그만 -2살 나이가 되어버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나이가 되어버린 할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고, 세상 밖으로 흔적이 없이 사라져버린다. 조지아나 할머니가 세상에 나타나려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마이너스 약 대신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브리스톨이란 나무를 삶아서 만든 플러스나이를 먹는 약도 만들어서 조지아나 할머니에게 결국 81세의 주름진 나이를 되찾아 주고 자신의 나이로 사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욕심과 순응을 말해주는 것이다.

내가 어느 날 문득 잃어버렸던 상실감 중에 큰 원인은 내 마음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사람마다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현실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 꾸었던 꿈을 장치할 언어, 좀더 맑고 진실하고 젊은 글로 누구라도 사로잡고 싶었던 욕심을 채워줄 자존감의 언어를 지쳐버린 삶속에서 잃었던 것을. 그런 나를 알 것도 같다. 마법의 마이너스 나이 약을 먹고 그것들을 만회하기 위하여 내 나이 지금 10년만 젊어진다면! 아니다. 지금 내 나이와 자리, 내 파트너 그리고 내 친구들이 나와 행복의 최선이다. 욕심 부리다가 -2나이가 되어 세상에서 종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아이를 찾아서 동화를 읽다보니 나는 진정 어른이 되어 동화의 참맛을 알겠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듯이 동화는 모든 책의 아버지그럴 듯하다. 예전에 엄마가 넌 조숙한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어떤 구석이 늦되다.”고 혼잣말처럼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제발 내 안의 것들이 늦되어서라도 빛나는 삶의 언어를 건져 올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주름지며 늙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린이는 어른을 투명하게 본다. 어른이 되니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동화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