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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구름 유희 / 고임순

구름 유희 / 고임순


 

 

유원에서 돈황으로 가는 새벽, 광활한 고비사막의 길을 버스에 흔들리면서 창밖 하늘을 응시한다.

오렌지 빛 구름들이 점점 불그무레 번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둥근 해가 솟아올랐다. 망망 사막지대 지평선 위로 아무 막힘없이 뽈록하고 올라온 둥근 해. 극히 원시적인 자연 분만이 아닌가. 멍울진 가슴이 탁 트인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 바라본들 이보다 더 감동적인 해돋이 장관이 있을까. 비로소 나는 북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았다.

구름은 햇빛으로 목욕이라도 한 듯 파란 하늘에 흰 속살을 드러내고 여러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다. 햇솜을 뭉쳐놓은 듯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하고 천사의 너울자락처럼 길게 늘어지는가 하면 때로는 새나 동물 모양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 모습으로도 바뀌어 가며 추억을 몰고 오는 게 아닌가. 아무 구애 없이 하늘 무대를 주름잡는 천태만상의 구름 유희를 감상하는 즐거움에 빠져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 풍경이 지루하지 않았다.

지난 한 해 동안 내내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리움 훌훌 털어 송두리째 저 구름에 띄운다. 욕심 털어내 마음을 비우면 더 갖고 싶어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구름 언저리를 맴돌며 깨우침을 준다. 다양한 욕망의 색체가 사라진 풍광,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황무지에서 나는 생긴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멀리서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해 새로운 세계로 과감하게 도망쳐 나온 실크로드 여행. 낭만 넘치는 어감이 감도는 이곳에 세계 모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위대함은 무엇일까. 미술협회 회원들의 스케치 여행이라는 말에 끌려서 나는 선뜻 이 여행에 뛰어든 것이다. 미지의 오지대에 내 한 몸 내던져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구름 위에서 달래본다. 허심탄회, 둥둥 떠가는 구름을 친구 삼아 어디까지라도 함께 가리라.

 

구름의 시인 헤르만 헷세의 시 구절을 떠올리며 스케치 북을 펴고 연필을 들었다. 변화무쌍한 구름의 모습을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그리기란 쉽지가 않다. 연필 잡은 손이 떨려 자꾸 빗나간다. 흔들리는 버스 속이 아니더라도 아득히 먼 곳에 어리는 환상의 물체를 어찌 내 둔한 붓끝으로 그릴 수 있으리. 오직 구름의 극히 부드러운 유연성 속에 꽉 찬 순박한 알맹이만을 가슴속에 그려놓는다.

행복한 하늘나라와 가난한 땅 사이에 놓여 있어 모든 인간의 그리움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되어 있는 구름, 삶의 유희이고 눈의 위안이고 신의 축복이며 전율이고 분노이며 대지의 영원한 꿈인 구름. 어느덧 나도 구름의 시인이 되어 구름의 움직임을 감상한다.

두문불출, 집에만 파묻혀 뼈에 사무친 고독감을 되씹으며 글쓰기에만 몰입했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어디론지 멀리 떠나가 가슴 속 응어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 집을 뛰쳐나왔는데 왜일까. 막상 많은 여행객 속에 끼어 웃고 떠들어대도 외로움에 휘감겨서 고독감을 더 느끼게 되는 것은. 다만 내 안의 우울한 진심을 꺼내어 하늘에 띄우면 천진하게 유희하는 구름의 모습에서만이 감미롭고 자애로운 정을 느끼며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구름이 유인하는 데로 따라다닌 여행길, 실크로드는 중국과 서양의 경계, 문화 사상을 소통시킨 대동맥이다. 옛 사람들은 낙타에 짐을 싣고 걸으며 고된 삶을 구름의 유희에 위로 받으며 다녔으리라. 서안에서 시작된 이 길을 우리 일행은 편안하게 버스에 흔들리며 돈황을 거쳐 투루판을 지나 신강 위루르자치구의 수도 우르무치에 이르렀다.

이곳은 북쪽에 알타이 산맥, 중부를 꿰뚫은 천산 산맥, 남쪽에 곤륜산맥 등이 있어 이 3대 산맥의 특징이 살아 있는 지형으로 지구의 끝자락에 신이 은밀히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별천지다. 이 천혜의 자연 풍광 가운데 특히 우리를 매료시킨 것은 유리알처럼 맑은 천지(天地)라는 이름의 해발 1911미터의 고산 호수였다.

유람선을 타고 코발트 빛 호수 위를 미끄러지면서 바람에 취한다. 호수를 둘러싼 신비스런 산자수명(山紫水明)의 경치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눈을 들어 또 한 번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침엽수로 짙푸른 천산의 만년 설산(雪山) 위로 거대한 구름덩어리가 서서히 움직이며 광채를 내뿜고 있지 않는가. 마치 구름의 고향인 듯, 그 동안 떠돌던 조각구름들이 더 모여서 순백색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나를 기다려준 것일까. 아니면 나를 환송하는 잔치일까. 대자연의 환상적인 조화의 신비함에 그저 푹 빠져들 뿐이었다.

천혜의 운치를 지닌 천지를 뒤덮은 구름의 소박한 넓은 가슴에 안겨 나는 비로소 내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89일의 여정을 돌아본다. 유구한 세월을 이어온 파란만장의 피난길 역사, 흥미로운 문화유산, 불가사의한 민정 풍속, 천연의 예술화랑과 역사박물관, 왕족 유적지인 흙의 성벽문화, 상상을 초월한 석굴과 불교예술의 개화, 목간등 위대한 서화예술의 흔적, 등에 접하면서 감탄했던 눈을 더 말갛게 씻어주는 구름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해 저문 호숫가 더욱 하얗게 드러난 구름이 온몸으로 내 등을 민다. 더 좀 머물고 싶은 아쉬움을 남기고 뒤돌아서며 나는 또 헷세의 시구를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