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내 안의 작은 행복 / 허순애

내 안의 작은 행복 / 허순애


 

 

해묵은 서류를 정리하기로 했다. 차분히 앉아서 들여다보니 그놈들이 무척 반기는 눈치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고 그동안 찾던 것들이 두서없이 꽂혀 있기도 했다. 들춰 보다가 지저분해진 손이 닦고 싶어졌다. 밖으로 나왔다. 벌써 어둠이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해를 마감하는 거리의 풍경들은 부산스러웠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네온사인의 불빛이 싸아했다. 70미터 큰 대로변에 위치한 사무실 주변에는 꼬마전구로 치장된 나무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름철 왕성한 잎들은 듬뿍 껴안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리고 다시 새 잎을 움트게 하는 나목. 그 자체로 훌륭한 장식이 아닌가 싶다. 골목길을 막 돌아서려는데 어느 해 겨울 바이칼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생생한 칼바람이 볼을 스쳤다. 어둑어둑한 뒤꼍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일었다. 다가가 보니 리어카를 옆에 두고 휴지통을 계면쩍게 뒤적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들이 다 줍고 간 뒤에 뒤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부는 쪽을 막아선 채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 내일 사무실로 오세요. 신문지 좀 드릴게요.”

그는 나를 의식도 하지 않은 눈치다. 언 몸이라 움직이기도 어려웠는지 모른다. 나는 반복해서 말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와 보기도 할 텐데왠지 챙겨 주고 싶었다. 폐지를 문 밖에 내다 두면 빨리 없어졌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이튿날 아침부터 아저씨를 기다렸다. 사무실 공간이 복잡하지만 내다 놓은 종이들을 입구에 모아 두면서 가끔 뒤쪽으로 나가 보기도 했다. 신문지가 많이 있다고 할 것 후회도 되었다.

어제 저녁에 보았던 텅 빈 리어카에 신문지를 꽉 채워 주고 싶었다. 누군가가 조금만 밀어 주면 어려웠던 고비를 훌렁 넘길 수 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제 저녁과는 다르게 오후 햇살이 따스했다. 아저씨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몇 번을 들락거렸다. 그런 와중에 폐지를 줍고 다니는 다른 사람들이 더러 지나갔다. 나이든 사람도 있지만 젊은 사람도 있었다. 어려워진 경제 탓인가 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더 자세히 얼굴을 익혀 둘 걸. 그렇지만 어제 그 아저씨는 직감으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뒤쪽을 바라보니 아파트 담장을 바람막이로 폐지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아저씨는 기척이 없었다. 다가가서 사무실 위치를 다시 한 번 가르쳐 주고서 돌아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는 오지 않았다. 다시 밖으로 나가니 이제야 겨우 사무실 뒤편에서 어눌한 동작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먼지를 털고 옷깃을 바로잡는 아저씨의 모습은 남루했지만 태도에는 반듯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손을 덥석 잡는 순간 거친 나무껍질을 만지는 것 같았다. 사무실 안으로 안내했다. 그가 가져가야 할 량을 가르쳐 주고서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싱긋 웃기라도 해야 할 아저씨는 웃기는커녕 난감하게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자 더듬거리는 말투로 먼 동네에서 빌려 온 리어카이므로 어둡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딱하기도 했다. 나는 가까이에 있는 고물상에 가져가서 폐지를 팔고 다시 오라고 말해 주었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 듯 빙그레 웃어 보이면서 폐지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신문지를 가져간 아저씨가 웬일인지 오지 않아 밖에 내다 놓은 남은 신문지를 도로 사무실 안으로 들여다 놓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할 쯤, 창밖에 그가 서성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순간 그의 몸에서 술냄새가 났다. 술값으로 다 새 버리지는 않았는지 조바심이 났다. “아저씨 술 많이 잡수시다가 추위에 큰일 나요.” 그러자 아저씨는 아시는 분이 사주었다고 어눌하게 말을 했다. 아저씨에게 술을 사 준 사람이 궁금하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번에는 노파심에 얼마 벌었어요?” 하자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소중하게 접은 돈 만 원을 정중하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어눌한 목소리로 다 가지세요.” 했다. 그 돈은 내 돈이 아니고 아저씨 몫이라고 내민 손을 강하게 밀쳤다. 그래도 수긍을 못하고 서 있는 아저씨의 용태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할 무렵 주춤하게 서 있던 그가 갑자기 큰절을 하는 게 아닌가.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조금 전과는 달리 빠른 행동으로 찬바람과 함께 재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닐 커버가 약간 벗겨지다 만 새 핸드백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만 그 가방은 팔 수도 있잖아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를 않았다. 끈 달린 털모자, 거무스레하고 무표정한 얼굴, 퍼포먼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좋은 수입원이 될 수도 있는 가방을 한사코 그는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더 이상 실랑이를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담긴 마음 때문에.

그는 나머지 폐지를 모두 싣고 리어카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서서히 굴러 가는 리어카 위로 털모자가 솟았다 내려갔다 몇 번인가 반복하더니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갔다. 어둠이 내린 골목길을 바라보면서 왠지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로등 불빛이 어른어른했다. 이튿날 아침, 사무실 주변이 깨끗했다. 누군가가 청소를 말끔히 해 놓았다. 내 안에서 작은 행복이 번져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