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삼각지 / 진 민
딸아이가 붉어진 눈자위를 몰래 훔친다.
오기 싫다는 걸 억지로 불러 앉힌 자리다.
“엄마, 가슴이 먹먹해지네. 고려장 얘기가 이렇게 슬프게 들리다니….”
제법 심각한 걸 보니 열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가슴 속으로 깊은 울림이 있었나보다.
빠른 곡조의 댄스음악이나 랩을 즐겨듣던 아이라 생소할 법도 한데 ‘꽃구경’이란 노래가 세대를 초월한 한(恨)과 정서로 와 닿았는지, 장사익 선생님의 영원한 팬이 되기로 했다면서 유심히 가사를 들여다본다.
“어머니, 꽃구경 가요….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자신을 산에 두고 돌아서는 아들을 걱정하면서 솔잎 한 줌씩 산길에 뿌려 놓는 어머니의 심정을 온몸으로 노래한 열정이 딸아이의 감성을 한 뼘이나 웃자라게 한 것 같다.
장사익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돌아가는 삼각지’를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 했다. 요절한 배호보다 두 배를 더 살았으면서도 결코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다던 그 노래….
“애비야, 약국 문 열어야지, 늦겠구나.”
할머니의 채근에 눈치 빠른 나는 여느 때처럼 얼른 아빠 손을 잡고 따라 나섰다. 하얀 와이셔츠에 포마드를 발라넘긴 머리가 잘 어울렸던 아빠는 약국을 비워 두는 일이 많았다.
어깨 너머로 알게 된 약과 약값을 주고받으며 놀이터삼아 지내던 나를 동네어르신들은 ‘꼬마약사’라고 불렀다. 그분들은 아빠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서 틀어놓은 노래를 듣다가 “여기가 약방인지 다방인지 원,…”라며 따라 부르기도, 쉬어 가기도 했다.
뽕짝이라 불리던 노래는 몸체보다 배터리가 더 큰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정물처럼 조용한 약국 내부의 어린 내 마음까지도 한 바퀴 휘돌아 감았었다.
늘 머리가 아파 고생하던 옆집 할머니는 이미자 노래만 나오면 ‘뇌신’은 이제 필요 없다하면서도 습관처럼 약을 사갔고 ‘만성소화불량’이란 처방을 받은 미용실 아주머니는 나훈아 가락이 오늘은 왜 안 나오느냐며 내 볼을 꼬집는 시늉을 하다가, 빨리 들려 달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난 돌팔이 약사이기도 했지만 디제이 노릇도 열심히 했다. 아빠가 일러 준 대로 턴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레코드를 올려놓은 뒤, 가는 홈에 맞춰 카드리치를 살짝 올려놓으면 마술처럼 노래가 튀어나왔다.
아빠의 애장품 중에서 ‘돌아가는 삼각지’는 물론이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미미의 ‘단골손님’, 나훈아의 ‘고향 역’같은 곡이 수록 돼 있던 레코드재킷은 모서리가 해져서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도 제법 많았다.
“노래는 가히 ‘화조풍월(花鳥風月)’이란다.”
습관처럼 말하던 아빠가 조제를 하면서도,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노래를 들어서인지 나는 뜻도 모르면서 그 많은 가사들을 줄줄 외웠다. 빨간색으로 덮개가 씌워진 야전(야외전축)과, 테이프로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카세트라는 것도 처음 본 게 그 시절이었다.
어쩌다 친구 분이나 동네어르신이 모여 있으면 아빠는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게도 했다. 그런 날은 흥에 겨워 하모니카를 불면서 “어때, 근사하지?”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우쭐해졌다.
일보다는 사람을, 노래를 좋아했던 아빠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났다. 그 시절 아빠는 아무래도 약사이기보다 배호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유명한, 무명가수이고 싶었나보다.
아버지의 빈자리도, 옛 노래의 애틋함도 점점 멀어져가던 어느 날,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느라 내려야 할 목적지도 지나친 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아빠가 구슬프게 읊조리며 듣던 음률, 그 가사가 불현 듯 내가 잊고 지내던 용산 어느 골목 안, 약국 모퉁이를 돌아 귓가에 맴돈다.
장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곧장 부르는 사위에게 음반취입을 시켜주겠다고 추켜세우던 노래방에서, 어릴 때 자주 듣던 레퍼토리가 별처럼 쏟아지던 날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즐겨들으시던 노래를 하찮은 뽕짝이라 여기고 클래식이나 재즈, 팝을 밤새워 듣던 내가 취향이 다르다는 투정도 가끔 부렸지만 더는 쓸쓸해하지 않을 작정이다. 장인어른의 18번이라면서 호흡을 척척 맞춰 부르던 남편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감칠맛 나게 불러줄 테니까….
콘서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딸아이는 CD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노을’을 신명나게 따라 부른다. 볼륨이 크지 않느냐는 내 말을 들은 체도 않는 딸아이가 언제 눈물을 흘렸나 싶다.
음악장르도, 볼륨의 크기도 때로 세대(世代)를 단절하는 견고한 벽이 된다. 내가 음악소리를 조금 낮춰버리자 머쓱해진 딸아이가, “이 노래, 옛날에 한 때 유행했다던데 엄마도 좋아했어요?”라며 관심을 보인다.
이문세가 불렀던 ‘붉은 노을’은 그 뒤에도 ‘신화’, ‘유리상자’가 저마다의 색깔로 다르게 해석해서 불렀고, 최근에 ‘빅뱅’이란 아이돌 그룹이 리메이커해서 다시 유행시킨 노래다.
그 노래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었고 아직 발음도 잘 안 되는 아이들까지도 옹알옹알 따라 부르는 걸 보니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말없이 운전하던 남편이 슬그머니 볼륨을 올려놓는다. 노래가 부활한 걸까. 감정의 씨줄과 날줄이 시간을 초월해 끈끈하게 이어진 걸까.
친정아버지가 꽃구경 떠난 삼각지 뒤편으로 설핏, 붉은 노을이 진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고독이 몸부림칠 때 / 강숙련 (0) | 2016.08.08 |
---|---|
[좋은수필]내 안의 작은 행복 / 허순애 (0) | 2016.08.07 |
[좋은수필]땅거미 / 허세욱 (0) | 2016.08.05 |
[좋은수필]선인장과 친해지기 / 노현희 (0) | 2016.08.04 |
[좋은수필]오렌지 주스의 행복 / 권준우 (0) | 2016.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