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 / 허세욱
지난겨울, 상하이 어느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있었다. 덥석 오케이를 했다.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그 김에 노‧장(老‧莊)의 고향엘 들리고파서였다. 그런데 그 길이 만만치 않았다. 상하이에서 노자의 고향 루이까지 8백여 킬로 길인데다 설날이 가까워서인지 도시 표를 살 수 없었다. 마침내 입석표 한 장을 거머쥐었지만 열두 시간 완행열차를 콩나물시루로 갈 수 없어 망설이다가 졸업생 하나의 호의로 길을 나섰다.
루이를 반환점으로 귀로에 올랐다. 장자의 고향으로 알려진 안후이성 멍쳥을 들려서 최근 낙성했다는 장자의 사당을 보았다. 다시 멍쳥 북쪽을 스치는 궈강 나루터에는 2천3백여 년 전 장자가 농장 관리직, 곧 치웬리를 지냈다는 현장 그 어느 흙 두덩이에 작은 그루터기 하나쯤 눈곱처럼 붙어있었으리라는 기대로 찾았다. 아무리 뒤지고 아무리 물어도 자취가 없었다. 마침내 어느 주민으로부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적 표시가 있었는데 도로 확장 공사 때 헐렸다고, 나는 몹시 허탈했었다. 전국시대의 폐허가 결국 한 오라기 바람이었던 것을.
나는 뉘엿늬엿 낙조를 보며 차에 올랐다. 기사 또한 내친김에 상하이로 가자했다. 그 먼 길을 차는 멍쳥 시내를 벗어나더니 곧장 고속도로를 탔다. 그것은 일망무제의 안후이대평원. 이 대평원 6백 킬로 동남단에 상하이가 있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자 대평원에는 한창 땅거미가 내렸다. 창 밖에는 수천 수백의 부연 눈동자가 줄을 서고 있었다. 아니 부연 나목들이 귀대하는 사병처럼 행군하고 있었다. 장자의 고을을 밟아선지 장자의 나비가 내 안에서 파득거리고 있는지 몰랐다. 도대체 창 밖에 밀물처럼 다가오는 저 어둠들이 밤안개인지 저녁노을인지, 아니 꿈인지 생시인지, 심지어 중국인지 한국인지 가물가물했다.
외제 차 넓은 좌석에서 다리를 쭉 뻗은 채 편의를 누리고 있지만 창 밖에 따라오는 무진한 박모(薄暮)가 나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저 땅거미에 보이는 나목과 농가들, 모두가 눈빛을 잃은 채 다소곳 서 있는데 그 어디에도 등불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농가에는 소와 염소가 우리로 돌아오고 부엌에서는 오글보글 찌개가 끓고 안방에서는 침침한 호롱불 아래 딸그락 딸그락 수저와 젓가락이 부딪는 소리가 들릴 때다. 생각은 중국의 안후이평원이 아닌 내 고향 모갈로 맴을 돌았다.
추녀 끝에 눈이 내리고 쇠죽을 쑤던 사랑방 부엌이 부산할 때다. 큰솥 뚜껑을 열면 황소가 일어서듯 김이 솟았고, 고소한 냄새에 불현 듯 고파지는 배를 움켜쥐고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두들겼었다. 나는 아궁이에서 석류처럼 빨간 숯덩이를 모아 화로에 담고 그 시뻘건 불 위에 솔잎 재를 뿌리고 그걸 다독 다독 재워서 사랑방에 올려 드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했었다.
읍내에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았을 때, 나는 으레 동구밖에 마중을 갔었다. 그 하얀 두루마기가 펄럭이지 않으면 쉬엄쉬엄 동냥치 고개 턱자가미까지 가서 그 부연 땅거미 어드메쯤 숭얼거릴 것 같은 도깨비 발자욱을 듣다가 아버지 그 길쭉한 등 뒤에 붙어 졸래졸래 따라 왔었다.
내게는 설빔의 추억도 쟁여 있다. 섣달이면 어머니의 나들이에 신경을 썼고 떡방아를 찧는 날은 제일 즐거웠다. 서적굴 디딜방아에 가서 방아를 찧고 하얀 떡가루를 소쿠리에 담고 그 위에 하얀 배를 덮어 돌아오는 길, 때마침 풀풀 눈꽃이 내려 내 머리에 앉고 소쿠리에 쌓일 때 왠지 내가 가장 넉넉한 소년 같아 그 땅거미를 뚜벅뚜벅 걸었다.
그럼에도 박모는 서러웠다. 이맘때쯤 하릴 없이 고샅에서 놀다가 건너 마을 초가집 기다란 추녀 끝에서 뻘건 불덩이가 너울너울 올라가는 그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집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는 말도 들었다. 그때는 귀신이 기승을 부리는 때였다. 우리들 집집마다 토담 빛의 박모, 할머니의 까칠한 살갗 같은 박모면 어스렁어스렁 귀신이 머리를 풀고 큰 집 작은 집 행랑채 용마루를 껑충 뛰어서 하늘을 삼켰다. 혼불인가 보다.
정신을 차리고 내다보았다. 점점 어둠이 밀려왔지만 아직도 도사리고 있는 땅거미, 창 밖에는 추억이 주렁주렁했다. 먼 데가 그립고 옛날이 그립지만 저 창 밖에 등불 하나 걸렸으면 오죽 좋으랴! 저 어렴풋한 까만 기와 하얀 담벼락 사이에 파리만한 붉은 등 하나 걸렸으면 얼마나 따뜻하랴! 하긴 옛날, 나는 촛불 하나가 빵보다 집채보다 소중했었다. 촛불이 있는 곳이면 목숨을 맡기리라, 촛불이 깜박이는 곳이라면 긴 잠을 청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등불 하나 추녀 끝에 달고 누굴 기다리는 시간, 긴 세월 삭이며 돌아오는 나그네에게 장명들이고 싶은 시간, 그래서 박모는 설레임으로 치런치런하다. 아직도 먼먼 천애에 시선을 묻고, 곤드레만드레 칠흑의 심야보다 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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