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길잡이 / 김기석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군목으로 임관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시절 독도법(讀圖法) 훈련을 받았다. 나침반 하나와 등고선이 있는 지도 한 장을 들고 제시된 좌표를 찾아가는 훈련이었다. 등고선의 밀도에 따라 산세는 완만하기도 했고 가파르기도 했다. 지도로 보는 세상과 지형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등고선만 보아도 그 계곡의 모양이 떠오르고, 그곳에 자라는 식물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교관들의 설레발이 얼마나 신선했던가. 훈련을 마치고 집결지에 모였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운 동료들은 라면집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있었다. 우리가 온 종일 찾아 헤매던 좌표에 대한 해답은 라면집 메뉴판 뒤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요령부득한 사람들만 종일 산을 헤맸던 것이다.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다. 훈련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야간 훈련이었다. 내가 제법 지도를 잘 읽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동료들이 나를 따라나섰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 나침반을 지도 위에 올려놓고 지형을 살피며 방향을 가늠하는 일은 참 흥미로웠다. 모든 게 순조로운 듯했다. 하지만 어둠이 내리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계곡에서 산마루를 오르내리면서 방향을 잃고 만 것이다.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함께 걷던 동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달빛조차 없는 암흑 속에서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더듬더듬 걷다 보면 아슬아슬한 벼랑 앞에 서곤 했다. 어쩌면 산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즈음 길을 잃은 우리를 찾아나선 동료들의 랜턴 빛이 저 멀리 반짝이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가야 할 길을 확실히 알게 되자 힘이 났다. 계곡에 들어가면 불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산마루에 서면 그 빛이 덩두렷하게 드러났다. 동료들의 불빛은 큰 위안이었다.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아 지리산가리산 헤맬 때마다 동료들의 그 불빛이 떠오른다.
오래 전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이 기억난다. 카메라는 북극점을 향해 나아가는 탐험대를 뒤쫓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대원들은 명랑함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얼음바다에 빠질 위험도 있었고, 썰매를 끌고 얼음산을 넘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순백의 세계는 아름다웠지만 혹독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북극곰을 경계하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탐험대원들은 끈끈한 동료애와 명랑함으로 그런 어려움을 돌파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카메라는 한 대원을 준엄하게 꾸짖는 원정대장의 모습을 잡았다. 대원은 유구무언이었다. 그는 GPS를 통해 원정대가 가야 할 방향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만 GPS를 잘못 보는 바람에 대원들은 만 하루를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던 것이다. 대장은 그 하루가 대원 모두를 죽음으로 내모는 시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야 할 책임을 진 자로서 내가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 서서 길잡이로 산다는 것은 외롭고도 힘든 일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의 지향점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명증한 인식이 없다면 그는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과업을 준행해야 한다. 늘 겸손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묻되 분명한 지향과 중심을 견지해야 한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뱀이 하는 대로 버려두지 말라'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 책은 하와를 향한 뱀의 유혹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고는 그 열매를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 네가 신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 들큼한 유혹이었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 했다. 하지만 하와는 '신처럼 되리라'는 말의 덫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만다. 성경은 바로 그것이 타락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하와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이기를 포기하고 뱀의 의지에 따랐을 때 인간의 전락이 시작되었다. 나라가 어지럽다. 지도자들이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다. 그들의 스산한 마음을 거짓 종교가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민은 염려하고 있다. 종교가 타락하면 마성적으로 변한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그릇된 권위에 복종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세우기보다 그릇된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든다. 오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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