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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참 다행이다 / 백두현

참 다행이다 / 백두현


 

 

나의 소년기는 그럭저럭 잘나갔다. 잘나갔다는 기준이란 참으로 주관적인 것이지만 학생의 본분인 공부만을 생각하면 대략 그렇다. 초등학교 시절, 학년을 달리할 적마다 매번 우등상을 받았으며 예능에 소질이 있어 백일장이나 미술대회, 웅변대회 등 이런저런 구실로 상을 많이 받았다. 그런 이유로 형제들 중 부모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쉽게 말하자면 가세가 기운 한 집안의 버팀목이자 희망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사춘기라는 복병을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게도 샌님처럼 책상에 앉아 소비하는 시간들이 어쩐지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춤 잘 추고 노래 잘하여 여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애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때부터 흉내 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기 시작했고 몸치였지만 음주가무에도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욕심인지 허세인지 몰라도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할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싹트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마냥 즐거운 나날이었는데 그럴수록 가랑비에 옷 젖듯 나의 학교공부는 조금씩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뿌린 만큼 거둔다고 했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 참으로 혹독했다. 대입 학력고사를 치렀는데 내개 갈 수 있는 대학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친구들은 노력한 만큼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의 표현대로 나는 먹고대학에 입학했다. 먹고대학은 먹기만 하는 법, 인생은 공부가 전부는 아니라는 이상한 개똥철학을 읊어대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아무런 희망도 야망도 없는 참으로 비생산적인 나날이었다. 그럴수록 천성이 부지런하신 아버지는 새로 생긴 농공단지의 생산적으로 취직할 것을 종용했고 자존심이 강한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곳은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던 어머니가 갑자기 대성통곡하셨다. 도시에서 유복하게 살아가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어머니는 촌구석에서 땅을 파먹고 살아도 자식이 다섯이라 든든했노라고 하시던 분이다. 더욱이 다른 자식은 몰라도 어려서부터 싹이 좋았던 나만큼은 꼭 대학에 갈 줄 알았는데 창피해서 친정에도 못 가겠다며 흐느끼셨다.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바라보는 어머니의 등이 얼마나 초라하던지 난생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나의 재수가 시작되었다. 영어, 수학, 과학, 모든 과목의 기초가 엉망이라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위해 암기과목이 많은 문과로 쓰로 진로를 바꾸었다. 영어 대신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과학 대신 시회과목을 파기 시작했다. 6개월간이었지만 고시 공부하듯 달려들었더니 제법 성적이 올랐다. 그러나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아 원하는 대학에 갈 수는 없었고 지방의 그저 그런 대학에 겨우 입학했다. 성에 차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지난 과오를 생각하면 그래도 과분했다.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했고 아직 기회는 많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3년을 되찾기란 불가능했지만 현실을 받아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6개월 후, 학기말 작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성적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다. 성적표를 볼 줄 모르시는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드리기 번잡해 그냥 1등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음 학기 등록금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기뻐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기대했는데 어머니는 또 우셨다. 그냥 눈물이 아니라 감격의 눈물이라 무척 쑥스러웠다. 한 학기 등록금을 면제받는다고 집안이 흥하는 것도 아닐 텐데 참으로 민망할 따름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어느 날 홀연히 가셨다. 교통사고라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가셨다. 취직을 하면 월급을 타서 내복도 사드리고 남들은 다 하는 이런저런 효도를 흉내 내보려 했는데 네게 그런 기회는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며 살아온 지 이심여 년! 요즘 들어 그날의 장학금이라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어머니의 눈물은 얼마간의 돈 때문도, 멋진 성적표 때문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나의 어린 시적, 집안의 희망이었던 아들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하신 것인데 우둔한 내가 그 간단한 이유를 돌아, 돌아 지천명에 이르러 겨우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