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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일장일막 / 도무웅

일장일막 / 도무웅

 

 

 

사랑과 전쟁,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목이다. 애증이 뒤얽힌 부부간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가슴 뿌듯함보다 오히려 갈등과 오해에 힘든 역정이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마지막에는 부부생활의 문제점과 해법을 묻는다. 그 애증은 보다 진한 삶을 위한 한 과정일 수도 있으니 살아가면서 이러한 부부싸움 한 번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게다.

 

범부인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년을 넘기며 이른바 권태기가 찾아올 무렵, 언제나 다툼은 사소한 의견 차이에서 시작된다. 언쟁이 점차 위험수위를 넘나들다 마침내 안전핀마저 빠져버린다.

 

아내는 꼬장꼬장하기로 이름난 장인어른을 닮아 양심적이고 정직하긴 하나 때로는 직선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다. 몇 차례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어처구니없게도 마침내 가출까지 선포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도 내게 불만이 많으면 어디 혼자 잘 살아보세요!”

이 거침없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휑하니 집을 나선다. 남자의 자존심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좋아! 갈 때는 마음대로 가지만 그 이후는 뜻대로 잘 안 된 걸. 그렇게 알아!”

가출은 곧 이혼이라는 뜻으로 맞불을 놓았다. 하지만 점입가경, 결국 입은 옷 그대로 아내는 홀연히 화난 발자국 소리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성을 잃고 즉흥적 감정만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

 

손뼉은 맞부딪칠 때 소리가 난다고 했던가. 한쪽이 양보를 하거나 피하면 싸움이란 있을 수 없다. 여유가 부족한 내 자신도 문제였지만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의 신망이 너무나 얇은 것에 화가 나고 다툼의 상대가 갑자기 사라지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옛 석학, 한 자랑 하시던 양주동 박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날 부인이 말다툼 끝에 짐을 싸서 집을 나간다고 을렀다. 하지만 돌아올 차비까지 내놓으라는 해학적 연기에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어 화해를 하고 만다고 했다. 그런 지혜로운 싸움이라면 오히려 삶의 활력소가 되련만, 앙금을 남기고 떠난 아내는 더없이 옹졸해 보인다. 용서 받지 못할 자로 낙인찍고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옹골찬 다짐까지 한다.

 

이틀, 사흘, 소식이 없다. 당연한 일이건만 차츰 궁금해졌다. 장인 장모도 안 계시는 처가에 갔을 리는 없다. 대구의 동서한테 슬쩍 전화를 해 보았다. 역시 낌새가 아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생각을 않으려 애쓰나 어쩐지 빈자리가 점차 더 짙게 느껴진다. 밖에서 돌아와 아파트 문을 열면 빈 공간의 썰렁한 분위기가 더욱 찬바람을 몰고 온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아침저녁의 끼니 해결이었다. 첫날은 밥통 속의 밥과 냉장고 안의 찬으로 그럭저럭 해결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어디 가서 사 먹는 수밖에 없었다. 처량하기도 하려니와 그보다는 여간 불편하지가 않다.

 

사실 아내가 가끔 큰소리치는 단골 메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을 해주며 산다는 것인데, 새삼 그것 하나 제대로 해결할 수 없어 쩔쩔매는 모습이고 보면 그만큼 내 의식주는 아내에게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파출부 센터에 전화를 넣었다. 특별히 음식솜씨가 좋은 사람으로 부탁을 했건만 낯선 사람이 낯선 사람을 위한 작품이니 별 까다롭지 않은 내 식성이건만 영 식미에 맞지가 않다. 있을 때는 잘 모르나 없으면 크게 불편한 것이 전깃불만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닷새를 버텼다. 모임에 갔다 과음을 하고 온 날, 그냥 거실에서 쓰러져 잔 후 심한 감기에 걸렸다. 병원엘 갔으나 잘 낫지가 않는다. 감기란 원래 병원에 가도 일주일, 안 가도 칠 일이라는 우스개가 있던가.

 

몸까지 아픈 처지라 톡톡히 홀아비의 비애를 겪고 있을 즈음 가출한 아내가 뜻밖에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마침 저녁준비를 하고 있던 파출부에게 잔뜩 의혹의 눈초리를 쏘았다. 뒤에 안 일이지만 아내는 옆집 부인과 계속 통화를 하면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낯모르는 여자가 드나든다는 소리에 증거라도 잡겠다는 심사였는지 황급히 달려온 모양이다. 내심 아내의 귀가에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표정관리를 하며 어느새 전의를 되살리고 내일은 이혼수속을 하러 간다는 말을 입에 올리며 허세를 부린다.

 

모처럼 아내 솜씨의 저녁식탁을 맞았다. 뜻밖에 좋아하는 도루묵조림까지 놓였다. 도루묵이란 원래 묵치가 피란살이의 인조 덕분에 그 이름이 은어로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도루묵으로 도루 돌아온 바닷고기 아닌가. 여하튼 아내가 원래대로 도루 돌아가자는 뜻이니 이 도루묵은 화해 제의의 신호란 말이지?’ 속으로 아전인수 격 해석을 했다.

 

그것은 또 좋은 안주감이니 술 한 잔 생각이 났다. 이럴 때 조건반사적으로 나오는 술 생각은 더없이 반갑다. 냉장고 안에 할 일 없어 누워 있던 녹색 소주병을 꺼내니 그들도 기지개를 켜며 모처럼 생긴 소임을 반긴다. 한편으론 그래도 당신 생각을 나는 알고 있어라며 실실 비웃는 듯도 하다.

 

역시 술은 사람의 마음을 여유롭게 만든다. 그런들 어떠랴. 저쪽에서 먼저 백기를 드니 안 받을 수 없다는 억지핑계로 호기를 부리며 제법 달아오른 얼굴로 술 한 잔 못 하는 아내에게 한마디 건넨다.

당신! 그동안 고생 좀 했을 테니 이제 그만 하고 술이나 한잔 받지 그래.”

자존심 센 아내도 그제야 반론 없이 겨우 묵묵부답. 떫은 웃음을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거실로 자리를 뜨니 며칠간의 냉전은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만 재인식시켜 주고 겨우 막을 내리게 되었다.

 

부부싸움이란 때로는 고뇌의 시련을 주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뒤돌아보는 계기와 반성의 되새김 속에 인생을 한층 도약시키는 기회의 장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자라온 환경도, 핏줄도 다른 사람들을 어느새 무촌수라는 인연으로 엮으며 삶의 역정을 만들고 또다시 단련시켜 주는 공장이기도 하다.

 

한밤중에 어쩌다 보게 되는 아내의 잠든 모습, 수십 년을 함께한 동반자가 아닌가. 모로 누인 작은 어깨에다 그곳에서 흘러내려 앞섶에 놓인 두 팔, 힘겹게 접은 나비의 날개처럼 지쳐 보인다. 싸움의 기개 대신 이제는 새삼 세월 속에 원숙해진 여유가 그 안에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 시대를 살며 터득한 전리품인가.

 

그렇게 우리 부부는 일 장 일 막이 끝나는 날까지 다투고 화해하며 그 속에 짙은 삶의 궤적을 긋기 위해 오늘도 달팽이처럼 삶의 무거운 등짐을 지고 더듬이를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