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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새 / 염귀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새 / 염귀순

    

 

 

섬섬한 손길을 기다리는 중이다. 땀과 먼지를 씻어내고 가뿐해진 얼굴, 세월을 머금은 피부가 거울 속이라고 뽀얗거나 팽팽할 리는 없다. 삶의 고저장단이 주름살을 새겼고 들고 난 희로애락에 얼룩덜룩 흠집도 나 있는 채다. 누그끄레한 삶의 이력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방금 물속에서 줄하된 민낯이 환상의 화장발을 기대하는지 살짝 죄어 당긴다. '피부가 마르기전에 수분을 보충하라.'

무릇 모든 사물은 그에 맞는 그릇이 있듯이 화사한 화장발은 촉촉한 피부 위에서 꽃피는 법이다. 우선 에센스와 로션으로 피부의 수분을 유지시킨다. 가물었던 대지에 단비인 양 스미어 차진 옥토가 되도록 수분크림도 충분히 발라준다. 톡 톡 톡, 두드리고 문지르는 손끝에서 피부가 녹진녹진, 윤택해진다. 시간을 지나오며 날려 보낸 물기를 이렇게나마 보충해주어야 산다는 일이 덜 황폐하리라. 피부 결을 따라 매끄럽게 오르내리는 손길이 은밀히 속삭인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간을 꿈꿔 보라고, 저의 솜씨를 기대해도 좋다고.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열망을 갖지 않은 여자는 없다. 왕후든 시골 아낙네든 어여쁨은 지혜에 못지않게 여자로서의 자신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일찍이 연지 곤지 찍으며 화장化裝이라는 예술이 시작되었겠다.

파운데이션을 얼굴에 골고루 발라 피부의 색과 결을 정돈한다. 색조화장의 첫 단계다. 세파가 남기고 간 자국들을 커버하려면 한톤 밝은 빛깔로 눈 밑 '다크서클'도 감쪽같이 지워야 한다. 얼굴의 중심을 잡아주는 콧등엔 하이라이트 터치를 해주어 입체감을 살린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역사적 설은 차치하고라도, 날렵하고 오뚝하게 솟은 콧대는 얼굴에서 자존심 아닐까. 평범한 얼굴도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이도록,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나날도 때론 감출 건 감추고 돋을 건 돋우어 산다는 일이 뚜렷해지도록 , 입체적인 명암법이 필요한 거다. 그 위에 적당량의 파우더로 유분기를 가셔주면 보송보송 환하게 돋는 얼굴, 까칠한 일상을 견딘 얼굴을 이만치라도 한 번씩 어루만져주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테다.

화장이 더욱 디테일한 묘사로 진행된다. 아마 아래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나란히 엎드린 두 개의 좁은 숲길, '눈썹' 그리기에 부리는 손의 거취를 보라. 단숨에 죽 긋는 일필휘지가 아니다. 한 자 한 자 마음을 심는 작가의 글 길처럼 조심스런 행로다. 최선의 '아트' 작업을 위해선 가볍게 출발하되 산의 정상頂上으로 힘차게 치닫다가 자연스럽고 완만하게 내려와야 한다. 얼굴 전체 이미지를 좌우하는 그것은 약간만 길거나 짧아도 영 어색하므로 몇 번씩의 수정을 마다하지 않는 '난코스'다 어떤 일이든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거늘, 각과 곡선을 살려 얼굴형의 결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눈썹 연출의 노하우라 할 만하다.

몇 초 안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눈이라면, 그윽한 눈매는 메이크업의 정점이라 하겠다. 한때의 초롱초롱하던 눈빛도 온갖 세상 꼴 다 보며 갖은 욕망으로 흐려졌으나 화장이라는 연출로 느낌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신비스런 눈매의 표현을 위해 옅은 색 아이섀도(eye shadow)부터 눈두덩에 얇게 펴 바르고 쌍꺼풀 선에서 각본대로 선택한 색깔을 부드럽게 '그러데이션' 해준다. 끝머리엔 포인트 칼라로 음영을 넣어준 후 검정색 아이라인(eye line)을 차분히 그리고 나면 깊고 또렷하게 열리는 두 개의 작은 태양, 메이크업의 세상이 실로 요지경이다.

그러나 창백한 피부에 화색을 풀어놓는 볼연지를 빠뜨리면 화장발도 불완전하다. 단내를 물고 있듯 발그름 탱탱하던 볼은 간데없이 여차하면 광대뼈만 도드라질 난처한 상황이지만, 볼 화장이 더해지면 화사하고 앳되어 보인다. 그렇다고 과한 건 금물이다.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가볍게 터치하는 법도 알아야 하는 삶의 방식와 상통하리라. 물론 쉽게 넘겨서도 안 되는 일이다. 오래가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마침내 화룡점정, 메이크업의 완성은 립스틱에 있다. 여태까지의 블링블링한 '아트'도 립스틱이 아니면 자칫 불 꺼진 방으로 남을 수밖에, 피부 결을 다듬고 윤곽을 수정하고 입체감을 살려 도색작업을 했다 한들 "나 살아 있어!" 라며 '' 불을 밝히는 데는 립스틱만한 것이 없다. 매끄럽고 달콤하게 빛을 꺼낸 든 그것을 여자의 강력한 무기라고 하였나. 기품 있거나 고상할 틈이 없는 입술이 새치름하게 입 꼬리를 올려 립스틱을 바르는 순간 고혹적으로 바뀌는 치명적인 매력, 립스틱이야말로 메이크업의 감탄사이며 비장의 마침표다.

화장(makeup) 서리 맞은 잎처럼 시드는 여자나이도 일순 돋을볕을 피워주는 예술이 화장 아닌가. '열흘 붉은 꽃 없다'는 시간의 횡포에 천하절색 양귀비나 세기의 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속절없이 이울어 간 터다. 물색 고왔던 계절 어디 가고 날마다 거울 앞에서 기가 죽은 여자가, 화장발의 예술로 한순간 날개를 단다. 바람 든 뼈와 깃털이 빠지는 몸을 초록 나뭇가지에 기대어 가다듬고 날마다 창공을 나는 한 마리 새를 닮았을까. 시간의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는 간절한 삶이 눈물겹다. 산다는 일은 미스터리인지라 언제까지 진행형일지도 미스터리인 여자. 어쩌면 타인의 손길로 지상에서 마지막 메이크업을 받는 날, 허공으로 드높이 비상할 것도 같은

거울 속 내 얼굴에 어머니가 보인다. 삶의 물기를 날려 보낸 주름살 자잘한 어머니가 내게 와 있다. 마음 안에 들어있던 낯익은 어머니를 뜻밖에도 거울 속에서 만나 부재이면서 실재인 얼굴에 화장을 해준다. 봄을 듬뿍 넣은 화장품으로 산뜻 새뜻하게, 어머니의 몫까지 보얗게 발그름하게, 연분홍 벚꽃 빛이 속속들이 물들어 가도록, 삶의 껌껌한 그림자들이 자취를 감추도록, 푸드득! 어느 숲에선가 이름 모를 새의 날갯짓 하나가 시작된다

오늘 화장은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