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호두나무 / 박영자
아버지의 고향집에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었다. 고개를 한껏 젖혀야만 나무의 끝이 보일 정도로 크고 우람하며 잘 생긴 나무였다.
지금은 몰락했다고나 할까, 보잘 것 없이 폐허가 된 집이 안타깝지만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할아버지 댁은 그 동네에서 부잣집 소리를 듣는 좋은 집이었고 운치가 있었다. 산 밑에 ㄷ자로 않은 안채에는 대청마루가 넓었는데 아름드리 기둥이며 나뭇결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 그 대청마루 한구석에는 박달나무 다듬잇돌이 놓여 있었고 단아한 차림의 큰어머니가 장단 맞춰 다듬이질을 하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안마당을 건너가면 사랑채가 있었고 할아버지가 긴 장죽을 물고 내다보시던 모습이며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어른들이 늘 사랑채에 드나들던 모습이 어렴풋하다. 바깥마당은 무척 넓었고 흙도배를 한 부뚜막처럼 깨끗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올달샘과 연못과 호두나무였다. 안채를 돌아 건넌방 뒤쪽으로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옹달샘에 맑은 하늘이 담겼고 그 물이 흘러드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늘 고요했으며 때때로 흰 구름이 흘러가는가 하면 잠자리가 꽁지깃을 적시고 가거나 제비가 물을 차고 날기도 했다. 그 연못가에 호두나무가 있었는데 아침이면 까치소리가 낭랑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깃들어 지저귀는가 하면 여름이면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울어대기도 했다.
추석 때 명절을 쇠러 가면 그 호두나무에 셀 수도 없이 많은 호두가 조발조발 열려 마음이 풍요로웠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나가보며 연못 위로 물안개가 자욱한데 물위에 아람이 벌어 쏙 빠진 호두 몇 개가 동동 떠 있었다. 호두나무 옆에는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자루가 긴 뜰채가 세워져 있었고 누구든지 일찍 일어난 사람이 그 뜰채로 호두를 건졌으니 사촌들과 어울려 호두를 건져 올리는 일은 낚시질만큼이나 재미있던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부자이기도 했지만 집안에 연못까지 파놓고 즐길 많치 풍류가 있었던 분이었던 듯싶다. 한 때는 도둑이 들까 봐 돈뭉치를 참새가 깃들 듯 초가집 처마 밑에 여기저기 숨겨둘 정도로 풍족했다지만 재물은 3대를 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아버지는 재산을 축냈고 아버지는 홧김에 객지로 떠났으니 집안은 기울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할아버지가 임종하시자 족제비 몇 마리가 돌담에 올라서서 슬피 울었고 그게 집안의 업이었던 모양이라고 했다.
연못가에 서 있던 큰 호두나무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되던 해 식목일에 학교에서 내준 작은 묘목을 받아다 심은 것이란다. 아버지가 10살 때라고 하니 70년 전의 이야기이며 그 나무의 수령도 70년이 넘었다.
호두나무는 참 오랫동안 우리 집안 식구들에게 맛좋은 호도를 제공했었다. 큰아버지는 해마다 호두를 수확하여 형제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고 그 때마다 '이 나무는 네 아버지가 심은 나무'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큰 아버지가 손질해 놓으신 뽀얗고 대글대글한 호두를 한 자루 가지고 오는 날은 부자가 된 듯 흐뭇했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쁨 또한 컸었다
큰아버지는 작고 예쁜 호두를 골라 짝을 맞춰 놓으셨다가 내어주시며 나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곤 하셨다. 그 호두는 내 작은 손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앙증맞아서 뽀드득뽀드득 비벼대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직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향집을 지키는 사촌 오빠에게서 호두나무에 대한 소식이 왔다. 어느 날 새벽 잠자리에서 벼락 치는 소리에 놀라 뛰어 나가보니 호두나무가 쓰러졌더라는 것이다. 요 몇 해 호두가 잘 열리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단다. 80을 목전에 두고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지의 건강과 호두나무의 노화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가 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호두나무 역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겉은 멀쩡했는데 나무 밑동이 반은 다 썩었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앓고 계실 때 호두나무도 병중에 있었을 터인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지만 어쩌랴.
아버지의 일생과 호두나무의 일생이 그러하듯이 나무의 일생은 사람의 일생과 많이 닮아 있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해서 우리 육남매를 두고 일가를 이루어 살 동안 호두나무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고향집을 지키며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지 않았던가.
호두나무가 한 생을 마감하기까지 늘 호두를 받아먹을 줄만 알았지 그 나무가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으며 얼마나 아팠는지는 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다.
고향집에 가면 그윽한 시선으로 호두나무를 올려다보시던 아버지는 그 나무의 마음을 헤아려 보셨을지 모르지만….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봄을 맞으면 서둘러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을 맺었을 것이며 가을이 깊어 열매를 다 털어주고 미련 없이 잎까지 벗어버리고는 허망한 웃음을 날렸을까. 아니면 만족하게 너털웃음이라도 웃었을까. 이내 묵도하는 자세로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듬으며 무엇을 소망했을까. 그 고독하고 힘겨웠을 세월을 한 번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미련함이 부끄럽다.
아버지가 객지에 나가 살면서도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시는 바람막이였듯이 호두나무는 고향집의 크나큰 바람막이였다.
호두나무는 이제 순리를 따라 무거운 세상 짐을 벗고 떠나신 아버지처럼 땅으로 돌아갔다. 호두나무가 사라진 큰집 연못은 얼마나 허허로울까. 아버지가 안 계신 친정집처럼 썰렁하도록 찬바람이 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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