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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절구불(佛) / 김은주

절구불() / 김은주  

 

 

 

떡집 앞 어두운 곳에 백발의 절구 불이 있다. 방도 아닌 그곳에서 깨어 있을 때 보다 졸고 있을 때가 더 많지만 감은 눈으로 절구질만은 잘도 한다. 짧게 자른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가시 같은 손목으로 나무공이를 움켜 쥔 채 쉼 없이 절구질을 해 대고 있다. 난만하게 핀 저승꽃이 손등에 가득해도 살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절구질은 그치지 않는다.

기계적인 반복이 지루해질 즘이면 울도 없는 가게에 손님이 찾아 든다. 금방 볶은 통깨를 앉은 자리에서 빻아준다. 노쇠한 팔목은 언제 졸았냐 싶게 빨라진다. 앉은뱅이 의자를 끌어당겨 바빠진 손놀림에 맞추어 수다를 떠는 손님도 있고 장을 봐 올 터이니 빻아놓으라 부탁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손님이 곁에 있으면 나무공이는 더욱 세게 춤을 춘다.

궤짝하나 엎어놓은 가게에는 참깨, 들깨, 콩가루, 이게 다 이다. 품목이 어설픈 이 가게에서 뭘 살까 싶겠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절구불의 그 가공할 만한 깨소금 맛을, 나 역시 절구 불의 후줄그레한 입성도 개의치 않고 애용하는 이유는 시중 깨소금과는 비길 수 없는 고소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절구가 별스럽다 싶을 정도로 친숙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지병으로 늘 약을 달고 살았던 아버지를 보면서다. 흰 액체의 위장약을 드시고는 알약을 드셨는데 주먹만 한 사기 절구에 알약을 찧어 그 가루를 드셨다. 하루 세 차례 알약 찧는 일이 아버지는 적잖이 지겨웠으리라. 그럴 때마다 소꿉놀이 보다 더 재미있는 그 일을 늘 내가 자청해 했다.

밖으로 달아나는 알약을 가두려 손바닥으로 절구를 에워 싼 다음 절구질을 했다. 아버지의 아픔 따위는 아랑곳없었고 절구질이 마냥 재미났다. 빻는 일이 재미없을 때는 공이를 절구의 가장자리에 둥글게 부비면 절구가 우웅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찧을 때와 다른 소리가 사기 절구에서 나면 그것이 재미나 자주 공이를 사기 절구에다 빙그르 돌렸다. 한 손에 물 컵을 들고 약을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으흠'하고 헛기침을 하시면 그제야 정신이 들어 절구 놀이를 멈추고 약 찧기를 계속했다. 절구놀이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소지품을 정리하다 절구가 내게는 제일 소중한 물건처럼 느껴져 책상위에 올려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망자의 소지품은 지니는 것이 아니라며 상여가 나갈 때 큰언니가 소리 나게 땅바닥에 패대기쳐 버렸다. 원래는 이승의 정을 거두어가라는 의미로 사기 접시를 깨뜨리는데 아버지는 절구를 깨뜨리며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 때는 사기 절구 깨어지는 소리가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슬펐다.

그 후 어떤 상황에서도 절구를 보면 그 배경에는 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처음 절구 불을 만났을 때도 그 분의 짙은 눈썹 때문에 무심히 지나쳐 가지 못했다. 안 움큼이나 되는 아버지의 눈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늘어진 아버지 셔츠 사이로 손을 넣어 마른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손장난이 절구 불의 목덜미를 보며 새삼 떠올랐던 것이다.

평생 쉬지 않고 노동의 책임을 다하며 어리석을 정도로 고집스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구 노인이 왜 불로 밖에 보일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마음도 몸도 메여짐이 없다. 순한 그분의 눈을 들여다보며 십분이라도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 속의 불순물이 일제히 직립 하는걸 느끼게 된다. 매사에 이문을 따지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누구라도 그 앞에 가 염을 이야기 하면 산 속의 돌부처처럼 다 들어줄 것 같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두툼한 시티로폴 박스위에 정좌해 있을 때는 풍경소리 들리는 선방에 스님 같다. 손목에는 여러 겹의 염주를 무겁다 싶을 정도로 감고 있다. 가끔은 절구질에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물으면 웃으며 그냥 고개만 저으신다. 각각의 염주는 절구질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묘한 소리를 낸다. 고요한 밤 몽돌을 쓰다듬고 밀려나가는 파도소리, 그것 같기도 하고 가을걷이를 끝낸 엄마의 켜 안에서 구르던 팥알 소리 같기도 하다.

기분이 거나한 오후 나절에는 문방구에나 있을법한 학습용 피리를 꺼내든다. 깨소금이 간간히 박힌 때 낀 손톱으로 피리를 불기 시작한다. 바위에 걸터앉아 도포자락을 걷어 올리고 젓대를 꺼내 부는 신선 못지않다. 일정한 음륭이 감지되지는 않지만 끊어질듯 이어지는 기묘한 소리는 학습용 피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유치하지 않다. 중모리에서 자진모리로 또다시 동살풀이로 오는 동안 컴컴한 재래시장은 일순간 환해진다.

깊어진 눈길이 저 너머의 세상에 가 닿아 있다. 현실과 피안을 넘나드는 그 소리는 깨소금 맛보다 더 고소하다. 깨소금도 깨소금이지만 어떤 이는 피리소리를 듣기위해 일부러 느지막이 시장을 나오는 사람도 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피리 소리는 시장 안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마음에 밥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한다. 바람이 눈에 보일리는 만무한데 그의 피리소리에는 바람결이 보인다.

빈 가슴은 언제나 넘보는 이가 많다. 절구 불 역시 간단치 않은 삶 속에서 '가난'이라는 만만찮은 적수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들켰으리라. 그러나 굴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가난의 독함을 애 저녁에 알았더라면 그의 삶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졌을까? 그렇지 만도 않았을 것 같다. 물질을 알았다면 아마 자유로움은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아무것에도 메여있지 않다. 묵묵히 감내 하는 모습이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일찍이 혼자 힘으로 맞설 수 없었던 가난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절구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세상 밖으로 곁눈질하지 않고 선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귀한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절구 불은이제 시장 모서리에 자신만의 사원을 지었다. 육신의 기력이 다해 불이 되는 그날까지 절구질의 손놀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