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질 소리 / 강여울
방문을 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빈 컵이 식탁에 닿는 소리, 소리들이 키를 세워 제 목소릴 또렷이 내는 새벽이다. 대문을 여는 소리가 아주 멀리까지 간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눕는 포도를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오늘따라 산길이 유난히 가파르게 느껴진다. 숨이 차 잠깐씩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콧물을 닦는다. 감기도 아닌데 숨이 찬만큼 콧물도 증가되는지 훌쩍이며 걷는다. 훌쩍이고, 헉헉거리는 내 소릴 산은 불평 없이 박자 맞춰 넙죽넙죽 받아 삼킨다. 숨이 너무 차 목이 아프고, 모든 신경이 코와 입으로 몰려 내 숨소리는 폭포소리로 귀를 때린다. 그 소리에 눌려 발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계속할 뿐이다. 마치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이 내 발이 아니라 머리인 것 같다. 산이 나의 숨소릴 잡아당겨 내 몸이 머리부터 당겨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산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으로 자고 있다. 갸름하게 여윈 달이 어미처럼 그런 산을 속속들이 쓸며 살피고. 별들도 달을 흉내 낸다.
정상 마루 퍼질러 앉은 너럭바위에 나도 퍼질러 앉아 눈 뜨지 않는 산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는다. 덤성 덤성 사람의 소리 들렸다가 금방 사라지는 것은 잠결에도 산이 그 소리 다 받아 삼키기 때문이다. 멀리 볼 수 없는 새벽어둠 속, 산을 깨우는 누군가의 야호! 소리도 꿀꺽 삼키고 산은 여전히 미동도 없다. 산머리 가르마 같은 길로 다섯 능선을 넘는 동안 응달마다 녹지 못한 눈이 바삭바삭 맛있게 씹히는 소릴 냈다. 산은 그런 발소리도 먹었고, 저 아래서 누군가 어험! 하고 내는 기침 소리도 날름 받아 삼키고 시치미를 떼었다.
산은 이렇게 온갖 소리를 먹고 살아서 맑고, 부드럽고, 무겁고, 거칠다. 눈이 내리는 소리, 바람 소리, 휘파람소리, 비오는 소리, 천둥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사람들이 내는 발소리 말소리…. 이 많은 소리들을 먹고 산은 소리 내는 것들을 키운다.
골을 타고 내려오는 길, 얼어있는 눈이 씹히는 발걸음소리에 산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한다. 나도 가만히 산의 소리에 귀 기울이니 계곡의 물소리가 어둠을 비질하며 아침을 여는 것이 아닌가. 비질 소리 번져서 산 아래서 수탉이 운다. 생각을 쏘는 수탉소리에 후다닥 날개 치는 그리움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자리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싸리비로 마당을 쓰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과 골목을 훤하게 쓸어놓고 세수를 하셨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몇 번 하시고 난 다음 "고마 일어나라." 하셨다. 잠결에 들리던 아버지의 비질 소리가 열어놓은 그 환한 길로 나는 하루, 하루를 걸어왔던 것이다. 어둠을 비질하는 계곡물 소리, 산은 호호 입김을 내뿜으며 환하게 하루를 연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겨울 다리목 / 한경선 (0) | 2017.03.06 |
---|---|
[좋은수필]종소리 / 홍미영 (0) | 2017.03.05 |
[좋은수필]절구불(佛) / 김은주 (0) | 2017.03.03 |
[좋은수필]거실 정원 / 김외남 (0) | 2017.03.02 |
[좋은수필]너무 좋은 향기 / 최원현 (0) | 2017.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