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다리목 / 한경선
만선 깃발처럼 눈이 내리는 날, 대구 두 마리가 스티로폼 썰매를 타고 왔다. 얼음 속에 누워서도 서슬 퍼런 지느러미가 꼿꼿했다. 마치 사막을 건너고 산맥을 넘으며 치열하게 싸우다 돌아온 개선장군 같은 기개를 뿜어냈다. 비록 생명은 잃었지만 제가 걸어온 길에 한 치의 후회나 아쉬움도 없다는 듯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꾹 다문 입, 이런저런 사연들은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바다 한 움큼 보낼 테니 힘을 얻어서 겨울 잘 건너라는 전화를 받고 마음을 거절하지 못했다. 얼버무린 대답 끝에 미끄럼을 타고 온 생생한 선물이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하나. 몸집도 큰데다가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것 같은 생선을 다듬는 것은 처음 일이라서 쩔쩔매며 스티로폼 주위를 서성였다.
생선을 통째로 냉장고에 들이자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비린 것을 즐겨 먹지도 않고 손질하는 것도 늘 서툴지만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물론 겨울바람을 맞히며 말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맹수도 아닌 생선 두 마리가 나를 꼼짝 못하게 하다니. 이런 성가실 일이 있나 하며 눈을 흘기는데 대구의 눈망울에 수평선 위를 떠돌던 흰 구름이 담겨 있었다.
굼뜨게 칼과 도마를 찾았다. 마지막 숨이 남아 있을 것 같아서 얼룩무늬로 남은 삶의 자국 거두기가 쉽지 않았다. 옆구리에 새긴 물결 모양의 이력을 훑어 읽으며 숨부터 골랐다. 먼저 말갛게 뜬 눈을 한쪽 손으로 가렸다. 그러고도 마지못해 칼을 댔다. 칼끝에서 느껴지는 등뼈가 단단했다.
생선 위에 칼을 대고도 더 나아갈 수 없는 손목에선 힘이 빠졌다. 대구는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었고 싸우고자 하는 의욕을 읽은 컬이 쉽게 들어갈 리 없었다. 작은 움직임도 없는 대구 두 마리와 대치하는 시간은 길었다. 누구라도 나타나 도와주기를 바랐다.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음식이 되어 나와 주면 좋을 텐데 마땅한 해결방법이 없었다. 허둥대는 것을 눈치 챈 대구는 더욱 거센 기를 뿜으며 나를 짓눌렀다.
눈보라 치는 밤길을 걷다가 눈도 못 뜨고 한 발 내딛지도 못한 채 속울음을 삼키던 때가 있었다. 미루나무 온몸을 휘감는 바람에 걸음이 휘청거렸다. 울음을 머금고도, 울먹이면서도 가던 길을 가야 했다. 산다는 건 그랬다. 대구도 알에서 깨어나 저만치 자라도록 차고도 깊은 바닷속에서 눈물 삼킨 날이 많았을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더러 숨이 막히게 두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헤엄치다 보니 산란할 때가 되었고, 마땅한 자리를 찾아 얕은 바다로 돌아온 대구를 인간들이 놓칠 리 없었다.
맥없이 몸을 부리기엔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두 손을 모아 칼에 힘을 주자 대구는 등뼈를 다시 곧추세웠다. 손길이 자주 멈칫거렸다. 눈도 똑바로 뜨지 못하고 더듬더듬 생선을 손질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암막으로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곳이 나타났다. 이제 연극은 끝나지 않았는가. 조심스레 막을 걷었다. 제 목숨 이어준 것들 장사 지내고 눈물 훔칠 새 없이 다시 물살을 헤치며 노를 저었을, 검은 막이 싸인 내장은 이승의 연을 단단하게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직 연극의 마지막 장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대구탕 끓일 일이 꿈만 같았다. 푸른 맥이 이렇게 짱짱한데……. 아무리 추위도 얼어붙지 않는, 겨울 바다 한 귀퉁이 떼서 건네준 손 민망하도록 창밖엔 막막하게 눈이 내렸다.
내리는 눈 사이로 흐린 가로등 불빛이 보일 즈음에야 어설픈 손질 자국이 그대로 남은 대구를 육수에 넣었다. 붉은 고추를 썰어 꽃잎처럼 얹어 주었다. 겨울을 용케 견디는 미나리 푸른 빛도 한 줌 띄웠다. 대구는 제 몸을 풀어 내 안의 찬 기운을 녹였다. 찬 바다를 건너온 자만이 할 수 있는 밀이었다. 그 삶의 끝은 담백했다. 달고 시고 쓴 어떤 맛도 남기지 않았다. 깊은 곳에서 울어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막은 내렸다.
대구는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제 역할을 다했다. 긴 여정은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고, 무대 위에 버려진 등뼈를 바라보는 관객만 남았다. 스티로폼을 타고 온 대구는 겨울 다리목에 엎드려 등 내어주고 그렇게 눈발을 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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